• [레져/여행] 심각한 음식, 즐거운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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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1.14 09:11:36
  • 조회: 10149
‘붉은여행가동맹’이라고 있다. 여행 스타일이 비슷하고 노는 방식이 비슷한 네 사람이 모여 만든 모임이다. 나와 여행작가 YH형, 시인 Y양, 여행잡지 기자 SH군이 회원이다. 이름과 달리 무슨 거창한 일을 도모하거나 계획하는 모임은 아니다. 그냥 가끔씩 만나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어디로 떠날까(지금까지 넷이서 한번도 함께 여행을 떠난 적이 없지만)를 궁리하는, 지극히 사소한 모임이다.
지난해 마지막 날, Y양의 집에 모여 가는 해를 보내고, 오는 해를 맞이하는 조촐한 파티를 하기로 했다. Y양이 ‘지난 한 해 동안 여행을 하며 먹었던 음식 가운데 가장 맛있고 기억에 남는 음식을 한 가지씩 준비해오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리고 파티 당일.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을 내놓았다. Y양은 과메기를 곱게 싼 접시를 내밀었다. YH형은 황태구이와 찜이 먹음직스럽게 담긴 접시를 식탁 위에 놓았다. SH군은 멸치조림과 안주용 마른멸치를 직접 만들어왔다. 나는 와인과 올리브 절임을 준비했다. 작은 방안에는 갖가지 음식 냄새가 가득 피어올랐다. 파티가 시작됐다.
“며칠 전, 포항 구룡포에 다녀왔어요. 온통 과메기 천지더군요. 차가운 겨울바람에 과메기가 말라가고 있었어요.”
Y양이 과메기를 가져 온 이유를 말했다.
“과메기 앞에서 잠깐 명상에 잠겼었죠. 명상 끝에 내린 결론은…. ‘저것들이 저토록 모진 바람을 맞고 꿋꿋하게 있구나. 그래서 몸에 반질거리는 기름기가 돌고, 맛이 드는구나’하는 생각. 몸을 온전히 바람에 맡긴 채 한 세월을 시달리고 났을 때야, 비로소 더 나은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더라고요.”
YH형이 끼어들었다.
“이런, 나도 그런 생각에 황태를 가져왔는데. 지난해 황태덕장에 갔을 때였어. 눈이 엄청나게 퍼붓는 날이었어. 덕장에 줄줄이 걸린 명태들이 눈을 다 받아먹고 있더군. 문득, 명태가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구수한 황태가 되듯, 우리 역시 모진 풍화의 시간을 견디고 나야 더 나은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다음은 멸치를 준비해 온 SH군 말.
“지난해 4월 부산 기장에 멸치 취재를 갔어요. 거기에서 멸치를 털어내는 어부들의 모습을 봤는데 정말 장엄했어요.”
SH군의 말에 따르면, 어부들의 작업은 4시간 가까이 계속됐다고 했다. 그물을 한 번 터는데 그물이 줄어드는 길이라고 해 봤자 고작 1m 정도. 1.4㎞의 그물을 다 털어내려면 한나절이 걸린다는 말이다.
“팔다리에 피가 몰린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모두가 행동을 맞추어야 그물을 제대로 털 수 있기 때문에 요령을 부릴 수도 없죠. 오후 6시에 시작된 작업은 밤 10시를 넘겨서야 겨우 끝이 났는데 그 동안 선원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그들의 몸과 정신은 오직 멸치를 털어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마치 어떤 최면상태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SH군은 멸치 털어내는 광경을 보고 깨달았다고 했다.
“삶은 우리에게 몰입을 요구한다는 사실. 어부들이 1m씩 그물을 털어내듯, 우리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마침내 목적한 곳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형은 왜 와인과 올리브 절임을 가져 온 거지?”
Y양이 물었다.
“으응, 사실은 말이야. 어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들 ‘심각한’ 음식을 가져 올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난 그냥 ‘즐거운’ 음식을 준비한 거지. 와인 한 모금에 절인 올리브 한 알이면 난 마냥 즐겁고 행복해지거든. 마치 내가 지중해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여행이라는 거, 혹은 삶이라는 거, 마침내는 즐거워야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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