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개성 '고려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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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8.01.14 09:10:46
  • 조회: 10764
[트래블]‘고려가 흘렀다’ 개성관광시대
개성행 관광버스에는 개성 남대문 위에 네 사람이 올라선 개성관광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왼쪽부터 황진이, 서경덕, 고려태조 왕건, 신숙주다. 우리가 탄 버스는 ‘박연 12조’였다. 조선 음악가 박연이 아니다. ‘박연폭포’의 그 박연이다. 개성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고려의 수도, 개성. 신라-경주, 조선-서울로 이어지는 역사 답사에서 고려는 언제나 비어 있었다. ‘통일이 되면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갈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 무렵, 버스는 개성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북측검문소에서 탑승한 안내원 ‘동무’가 마이크를 들었다.
“개성은 9○○○부터 1392년까지 고려의 도읍지였습니다. 당시 인구가 70만명이었습니다. 얼마나 집이 많았느냐 하면, 처마 밑으로 다니면 비를 맞지 않아도 된다, 할 정도였습니다. 개성에서 50리쯤 떨어진 예성강에는 아라비아에서까지 상인이 왔답니다….”
지금 개성의 인구는 40만명. 과거는 이제 빛바랬다. 왕궁이 있던 만월대는 터만 남았고, 4~5층 건물이 줄지어 선 시내에서는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버스는 박연폭포로 가기 위해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에 올랐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이 고려 신하 72명이 이성계에 반대해 몸을 피했다 떼죽음을 당한 두문동이다.
박연폭포는 금강산 구룡폭포, 설악산 대승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라는데, 과연 ‘때깔’이 달랐다. 높이 37m. 여름엔 폭이 7~8m로 넓어지지만 겨울이라 1~2m로 줄어 있었다. 다리로 연결된 왼쪽 바위섬은 황진이 전설이 내려오는 곳. 황진이가 머리채에 붓을 묶어 써내려갔다는 글씨가 남아 있다. “황진이가 멱을 감고 머리를 흔들며”라는 설명에 ‘애마부인’이라도 연상하는 걸까. ‘아저씨들의 눈빛이 황홀해졌다.’
폭포에서 걸어서 30여분 거리의 관음사는 고려시대 사찰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말이 사찰이지 사실 대웅전과 토굴, 승방 하나가 전부다. 고려 말인 1393년엔 대웅전 크기의 법당이 5개가 넘었다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모두 불탔다. 지금 대웅전은 1640년 “고려 건축을 그대로 복원해” 세운 것. “지붕이 사방에서 급하게 올라가잖습니까? 우진각지붕이라고 합니다. 처마와 지붕이 높고 처마가 길게 뻗어 있잖습니까? 그게 고려 건축입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승방과 비교해보니 과연 그렇다.
대웅전 뒤편 문살도 재미있다. 오른쪽이 미완성인데, 그럴듯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근처에 손재주가 뛰어난 11살난 운나라는 소년이 있었다. 사찰 복원 공사를 하면서 데려와 문살을 파게 했다. 일이 어찌나 많았던지 소년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재간(재주)이 원수다”라며 자신의 왼팔을 자르고 ‘농민 봉기’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소년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소년이 파던 그대로 문살을 걸어놓고, 소년의 모습도 새겨 넣었다고 한다. 문살에 새겨진 소년을 보면 정말 왼팔이 없다. 남한 같으면 ‘연못에 뛰어들었다’거나 ‘산으로 들어갔다’로 끝날 이야기가 북한에서는 ‘농민봉기에 참여했다’로 끝난다. 그러고보니 서경덕도 여기선 ‘중세 유물론 철학자’로 기억된다.
개성의 문화유산은 수학여행 때 만난 부여나 경주의 것들과 다르지 않았다. 박연폭포에서 관음사로 넘어가는 길의 대흥산성은 남한산성과 다르지 않았고, 관음사 앞 늙은 은행나무도 용문사의 은행나무와 닮아 있었다. 개성 시내 숭양서원도 가파른 언덕에 지어졌다는 점만 빼면 소수서원과 비슷했다.
서원에는 정몽주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여기가 원래 정몽주의 집이 있던 자리. 1573년 개성 유림들이 정몽주를 기려 서원을 세웠단다. 정몽주가 이방원의 철퇴에 머리를 맞고 죽은 선죽교도 지척이다. 우리는 ‘충신’으로 기억하는 정몽주를 북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안내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역사적인 인물이죠. 조선시대 양반들이야 ‘정몽주의 절개를 따라 배워 나라에 충성하라’고 표충비도 세웠지만 우리는 특별히 존경하진 않습니다. 인민을 위해 특별히 한 것도 없잖습니까? 선죽교에 피가 남아 있다지만 사실 불그스름한 바위죠. 아니, 정몽주 피는 독특한 피나? 수백년 지나도 안 없어지게.”
그래도 관광객들은 선죽교를 메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게 바로 정몽주 피야”라는 엄마 설명에 아이들은 “자전거 녹슨 것 같아요!”라며 혀를 쏙 내밀고는 다시 뛰어다녔다. 919년 ‘선지교’로 만들어진 다리는 정몽주가 피살된 1392년 ‘선죽교’로 이름을 바꾸면서 충절의 상징이 됐다. 길이 6.6m, 너비 2.5m로 크지 않다. 후손들이 ‘핏자국’을 보호하려고 다리 전체에 난간을 두르면서 다리의 기능은 상실했다. 옆에 덧댄 돌다리로 건너 다닌다. 표충각과 추모비가 있는 선죽교 앞은 딱 소풍 기념사진 장소다. 개성이 고향인 실향민들이 50여년 만에 ‘동창회 사진’을 찍는 곳이기도 하다.
고려박물관은 북한의 관점에서 본 고려사를 엿볼 수 있는 곳. 성균관 부지와 건물을 활용해 18채 가운데 4채를 전시관으로 쓴다. 조명도 어둡고 난방도 아쉽지만 전시물 수준은 높다. 고려청자와 금속활자가 전시돼 있고 ‘만적의 난’이나 ‘노비들의 몸값’을 소개한 안내판이 붙어 있다. 1대1 크기로 재현해 놓은 공민왕릉도 재미있다. 박물관 밖은 산책하기 좋은 곳. ‘애국명장’ 강감찬 장군이 세웠다는 흥국사탑이나 현화사 7층석탑 같은 불교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박물관 벽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동쪽의 나라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던 고구려의 지향은 10세기 초에 창건된 고려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고려라는 이름도 고구려에서 유래한 것이다.’ 분단이 단절시킨 것은 영토만이 아니었다. 고구려 혹은 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 개성관광이 단절된 역사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을까. 아이들은 고려박물관 앞에서 ‘V’자를 그리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정몽주요? 사회책에서 봤어요! 선죽교에서 피도 봤어요. 그리고…(아빠를 돌아보며) 뭐지뭐지? 아, 박연폭포도 봤어요. 아름다워요! 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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