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오라, 풍요로운 ‘사유의 세계’ 로[포즈 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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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11.09 09: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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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즈 필로’(Pause Philo). 우리말로 옮기자면 ‘잠깐의 철학’ ‘쉼의 철학’쯤 되겠다. 매일 똑같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을 잠깐 정지(Pause)시켜놓고, 우리의 일상을, 삶을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프랑스 밀랑출판사가 100권을 목표로 출간하고 있는 이 시리즈는 일종의 ‘철학 대중화 프로젝트’다. 프랑스 현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와 교사들이 대거 저자로 참여, 소소한 일상을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 철학에세이 시리즈다.
철학을 일반대중들이 좀더 쉽고 친근하게 느끼도록 풀어내려는 시도들은 많았다. 그러나 주요 철학자의 삶과 사상을 시간적으로 더듬거나 철학의 주요 개념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식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이 시리즈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일상에 주목한다. 평소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질문하고, 사유한다. 각각의 책들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거창한 이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땅을 내디디는 발걸음과 와인 한 모금, 진열창을 바라보는 시선같은 ‘작은 것’에서 시작된다. ‘걷기의 철학’ ‘쇼핑의 철학’ ‘와인의 철학’ ‘슬픈 날들의 철학’ ‘행복생각’ 등 이번에 시리즈 1차분으로 나온 5권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시리즈를 흥미만을 자극하는 가벼운 읽을거리로 단정짓는 건 금물이다. 사륙판의 아담한 크기에 200쪽 안팎의 분량만 보고 덤벼들었다가 꽤 난감해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사색들이 켜켜이 담겨있다. 걷기에서는 인간과 세계의 오래된 관계를 떠올리고, 쇼핑에서는 변해가는 정체성의 문제를 사유하는 식이다. 그 사유의 궤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철학의 창시자’인 탈레스에서부터 근대 철학의 시조 데카르트는 물론이고 20세기의 한나 아렌트와 메를로 퐁티를 거쳐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 이론까지 동원된다.
시리즈 첫 번째는 ‘걷기의 철학’이다. “우리의 첫 번째 철학 스승은 우리의 발이다”(장 자크 루소, ‘에밀’)라는 말을 감안하면 ‘걷기’를 처음으로 내세울 만하다. 실제로 걷기와 생각하기(철학)는 맞닿아 있는 점이 많아 보인다. “둘 다 몸과 정신을 동시에 이용하고,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으며, 노력을 필요로 하고, 결국에는 이러한 고생을 100배 보상해주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책은 걷기와 관련된 단어와 철학자들의 걷기 등을 통해 걷기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여러 의미들을 탐색한다. 특히 걷기가 우리에게 자연과의 관계를 되돌리고, 겸허와 인내를 가르쳐준다고 강조한다. 걷기는 교통수단 등의 발달로 인해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의 몸, 유한하고 제한된 우리의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시속 3~5㎞의 속도로 걷다 보면 세상의 크기와 현실에 대해 명료하게 의식할 수 있다. 하지만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세상은 점점 흐릿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시리즈 가운데 특히 독자들의 눈길을 끄는 건 ‘쇼핑의 철학’과 ‘와인의 철학’이 될 듯하다. 이 가운데 좀더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것은 후자다. 차가운 관념들의 세계에 살던 ‘금욕주의 철학자’에서 와인의 매력에 빠진 ‘쾌락주의자’로 변한 저자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쏟아져 나오는 와인책처럼 와인의 맛이 어떻고, 마시는 방법이 어떻고 하는 지식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대신 ‘우리가 왜 와인을 좋아하는가’라는 문제를 철학적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책은 와인에 대한 열정을 설명할 수 있는 요소로 세 가지를 든다. 와인은 우리를 ‘오감의 축제’로 초대하면서 자신의 몸과 감각세계를 재발견하게 한다. 또한 우리를 옭아매는 도덕과 이성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시켜 “자신들이 바라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되게 해준다. 그러나 와인의 쾌락은 ‘아무렇게나’가 아니라, 취미와 스타일이 있는 ‘진지한 쾌락’이다. 끝으로 “와인은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며, 때문에 우리를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만든다.
반면 ‘쇼핑의 철학’은 이번 시리즈 중 가장 독특한 책이다. 쇼핑이라는 행위가 단지 ‘소비’가 아니라 ‘소비와의 유희’라는 관점을 취하면서 우리의 선입관을 뒤집는다. 저자는 쇼핑에서 불만족의 징후만이 아니라 사물을 보는 데서 얻는 쾌락을 읽어내고, 쇼핑이 의미의 빈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밝힌다. 사치도 “소비의 과잉으로 정신적 규범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규격화된 것, 습관적인 것, 진부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잉여의 추구는 “섬세함의 추구”다. 따라서 쇼핑은 인간의 정체성을 포함한 모든 것의 변화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현대 사회의 ‘모험’이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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