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낮은 속삭임[코르도바를 느끼는 특별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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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10.26 09: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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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퍼강 삼각주를 위해 소규모 독립 여행(Small Scale Independent Tourism)이 필요합니다.’
포스터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으쓱했다. 우리 일행은 2명이었고,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알아서’ 여행하는 중이었다. 여기는 알래스카 남부의 작은 도시 코르도바. 방문자 센터를 겸하는 환경감시단체 ‘코퍼강 삼각주 유역센터’의 사무실을 찾은 길이었다.
사실은 기념품 가게인 줄 알고 들어갔다. 연어가 그려진 티셔츠와 비누 옆엔 코퍼강 삼각주의 흙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벽에 걸린 지도는 알래스카 송유관에서 기름이 유출될 경우의 가상도. 7만여마리의 새가 서식하는 알래스카 최대의 조류 서식지인 코퍼강 일대는 39시간 만에 기름에 덮인다. 삼각주 하이킹 코스에도 ‘책임여행자는(Responsible Traveller)’이라고 시작되는 안내판이 있었다. 지정된 길로만 다니고, 떠들지 말고, 망원경을 사용할 것.
솔직히 코르도바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책임여행’은 안중에 없었다. 빙하가 무너지는 장관을 보러 왔다. 코르도바 교외 차일즈 빙하는 30초에 한 번씩 무너진다고 했다. 다큐멘터리 채널에나 나오던 광경 아닌가. 빙하가 워낙 많아 ‘빙하 멀미’가 난다는 알래스카에서도 이만한 장관은 드물다. 차일즈 빙하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았다. 높이 90m, 30층 아파트 높이의 빙하가 총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빙하가 무너질 때마다 파도가 쳤다. 이렇게 녹아 한 해 150m씩 없어진다. 빙하를 보고 사는 이들에겐 지구온난화가 ‘버터’나 ‘샌드위치’ 같은 일상 용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일즈 빙하와 코르도바를 잇는 코퍼강 고속도로엔 낚시꾼이 많았다. 여름과 겨울 사이, 여기 사람들이 ‘어깨(Shoulder)’라고 하는 8월 말과 9월 초는 연어 낚시 시즌이다. 낚시꾼이 일부가 된 풍경은, 그대로 엽서였다. 산머리에 만년설이 쌓여 있고, 호수에 백조가 날아다니고, 물속에 뿌리내린 나무가 수면에 그대로 비쳤다.
코르도바의 인구는 3000여명. 뭍이지만 바다와 산으로 막혀 배와 비행기로만 연결된다. 사실상 섬이다. 1시간이면 뒷골목까지 둘러볼 수 있다. 맥도널드도 버거킹도, 월마트도, 블록버스터 비디오도 없는 곳. 여행사도 관광버스도 없다. ‘대형 체인 대신 현지인이 운영하는 숙소와 식당을 이용하라’는 책임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코르도바 상공회의소 홈페이지를 통해 비앤드비(Bed&Breakfast)를 소개받았다. 비앤드비 주인이 렌터카를 소개했고, 렌터카 직원이 문화센터를 알려줬다. 그런 식이었다.
문화센터는 엑손사의 기름 유출 사고를 비꼬는 조형물을 전시하고 있었다. 1989년 엑손사의 유조선이 코르도바 인근 발데즈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였다. 기름은 해류를 타고 코르도바로 흘러들었고, 주 어종이던 청어가 사라졌다. 항구에선 해달이며 바다사자가 새카맣게 기름에 절어 발견됐다. 바다에 기대 살아가던 코르도바의 어부들은 졸지에 터전을 잃었다. 93년 코르도바로 입항하던 엑손사의 선박은 어부들의 해상 시위로 되돌아가야 했다. 사실 조형물은 조악한 수준이었지만, 코르도바 어부들이 기름 유출 사고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지역사 박물관에도 당시 신문 기사 스크랩이 기름에 검게 변한 흙과 함께 놓여 있었다. 주민 상당수는 아직도 엑손사와 소송 중이다.
문화센터에서는 원주민 문화 중심으로 알래스카를 여행하도록 한 ‘알래스카의 원주민들’이란 독특한 가이드북을 팔고 있었다. 이 센터 자체가 코르도바의 첫 정착자인 이야크 인디언, 이주해 온 알류티크 등 원주민들의 문화를 수집하고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소장품 대부분은 주민들이 기증한 조상들의 유품이다. 천장에 걸린 고래뼈는 2000년 죽은 채 발견된 범고래 ‘오르카’. 주민들이 해체·재조립해 교육용으로 남겨뒀다.
‘오르카’는 코르도바 유일의 서점 이름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와 연어 요리법을 다룬 책 사이에 코퍼강 삼각주에 서식하는 새들만 모은 조류 도감이 보였다. 기름 유출 사고의 후폭풍을 다룬 책도 있었다. 코르도바에 사는 환경학자 리키 오트 박사가 썼다. 서점 맞은편은 ‘범고래(Killer Whale)’라는 이름의 카페. 유리창에 붙어 있는 ‘지명 수배’ 포스터엔 사람 대신 연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캐나다 북부 한 양식장에서 애틀랜틱 연어가 단체로 가출했는데, 다른 연어의 종적 순수성을 해치니 잡는 즉시 환경단체와 코르도바 어민 조합에 신고해 달란다.
자세히 보니 가게 창틀마다 ‘노 로드(NO ROAD)’라는 사인을 세워두고 있었다. 타 지역과 코르도바를 연결하는 도로를 뚫지 말자는 것이다. 지역 환경·시민단체가 벌이고 있는 캠페인이다. 대부분 개발을 하지 못해 안달인데, 코르도바에선 거꾸로 개발을 하지 말자고 주장한다.
항구에선 해달이 놀고 있었다. 통조림 공장에서 흘러나온 생선을 사각사각 소리내어 먹고 있다. 해달은 일본만화 ‘보노보노’의 주인공 동물.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해달이 코르도바에선 동네 강아지처럼 흔하다. 부표엔 가끔 바다사자가 누워서 햇볕을 쬔다. 박물관에서 본 기름에 범벅이 된 해달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저 신기하기만 하던 해달이, 돌아가야 할 지금엔 안쓰러워 보여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만 세게 쥐면 바스라질 연약한 생태계의 일부다.
해달뿐 아니었다. 카페에서 본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스타벅스를 먹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라는 스티커가 마음에 걸렸고, 민박집 화장실의 ‘원주민 언어로 본 지명’ 지도를 본 뒤로는 입에서 원주민어인 ‘데날리’ 대신 ‘매킨리’라는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화들짝 놀랐다. 코르도바에 유난히 알류트 인디언 후손이 많은 이유가 러시아와 미국, 일본에 차례로 침공당한 역사 때문임도 배웠다. 지도상의 점일 뿐이던 알류샨 열도가 문득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코르도바는 사흘 동안 그렇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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