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포구 배는 과거에 정박했다[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강경 근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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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10.19 08:5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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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갈, 젓갈, 젓갈이었다. 주황색 젓갈집 간판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젓갈 백화점, 젓갈 상회, 젓갈 판매장. 휴대전화 대리점의 홍보 포스터까지 ‘휴대폰이 젓갈보다 싼 집’이었다. 3번쯤 길을 잃고 나서야 낡은 잿빛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발치에 초록색 이끼가 낀 집들은 화석, 혹은 박제처럼 보였다. 강경의 ‘오래 전 좋았던 때’의 기억이다.
100년 전 강경은 나라 안에서 가장 흥성거리는 곳 중 하나였다. 강경 포구는 원산 포구와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꼽혔고, 한달에 6번 서는 강경장은 평양장, 대구장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20년대 이미 전기, 수도에 극장까지 들어왔다. 그 때 들어선 논산경찰서와 법원(대전지방법원 논산지원), 검찰(대전지검 논산지청)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논산문화유산 해설사 류제협씨(61)는 “믿기 어렵겠지만…”이라며 마른 기침을 뱉었다. “그러니까 군산·부여·공주, 이리·논산·청주가 모두 강경 권역이었어요. 강경 호남병원은 지금 삼성서울병원이나 아산병원쯤 되고, 강경노동조합은, 그렇지, 부산 부두노조쯤 되었던 겁니다.”
강경읍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옥녀봉에 오르면 그 말이 이해가 된다. 너르고 넉넉한 금강을 따라 사람과 물자가 강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충남 전역, 충청북도와 전라북도는 물론 중국의 무역선과 일본의 배들도 더러 강경을 찾았다. 해산물은 물론 약재와 일용잡화까지 모든 것이 강경장에 나왔다. 1920년대 사진 속의 강경장터엔 갓 쓰고 도포 두른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간다. 오늘날의 명동만큼이나 붐빈다.
사진 속 ‘남일당 한약방’은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한식도 일식도 아닌 ㄱ자 2층집. 1923년 지은 뒤 ‘연수당 건재 한약방’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30여년 전까지 영업했다. 안주인 왕영순씨(47)는 “시집 오니 2층에 약봉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2001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보수 공사를 했다. 바닥엔 장판이 깔렸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
자전거 탄 할아버지들이 이따금 지나갈 뿐인 이 주택가는 한때 강경의 부가 모이는 곳이었다. 150m쯤 떨어진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핵심이었다. 무너져 한쪽 벽만 남은 은행 창고엔 저당잡힌 건어물이 가득 쌓이곤 했다. 1910년 지은 은행 건물은 지금 봐도 입이 벌어질 만큼 크다. 구석엔 미처 옮기지 못한 금고도 남아 있다. 은행과 젓갈창고로 쓰였던 건물은 현재 비어 있다. 맞은편은 호남 최초의 병원이었던 호남병원 자리. 지금은 젓갈 판매장이 들어서 있다.
강경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 강당은 강경 상인들이 지어서 기증한 것. 1937년 세워진 뒤 지금까지 실내 체육관으로 쓰인다. 배구를 할 때 공이 가끔 천장에 닿는다는 것을 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국전쟁 당시 포탄을 맞고도 무너지지 않았다. 벗겨진 벽돌은 기총소사를 받은 흔적이다. 맞은편 강경공립상업학교(현 강경정보고등학교) 관사도 비슷한 시기(1931년)에 지어져 온전히 남아 있다. 지붕이 높고 급하게 흘러내린 딱 일본풍의 벽돌 주택이다. 지난해 2월까지 교장 관사로, 학생 합숙소로 쓰였다.
선생, 법원장, 의사, 경찰서장처럼 ‘힘깨나 쓰던’ 이들은 북옥리 주택가에 살았다. 지금은 좁은 골목과 낮은 집들이지만 당시엔 고급 주택가였다.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 북옥감리교회는 보기 드문 한옥 단층 교회다. 예배당을 딱 절반으로 나누는 자리에 기둥이 있다. 여기 가림막을 치고 남녀를 구분해 예배를 보았단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예배가 열린다. 물론 가림막은 치지 않는다.
강경의 전성시대는 철로가 부설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차례로 개통되면서 강경 대신 인천과 부산이 물류 중심지로 떠올랐다. 뱃길은 철길에 경쟁이 안 됐다. 1899년 군산 개항도 강경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새로 등장한 큰 배들은 수위가 낮은 강경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군산에 짐을 부렸다. 강경장은 1930년대까지 명성을 유지했다. 군산의 물자 대부분을 받아 판 덕분이었다. 그러나 강경의 번영은 한국전쟁을 거치며 끝났다. 공공기관이 모여있어 집중 폭격을 당했다. 근근이 이어지던 강경장도 198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90년 금강하구둑이 세워지면서 금강 뱃길은 완전히 끊어졌다.
10여년 전 젓갈축제가 시작되면서 강경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팔고 남은 막대한 양의 해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일찌감치 염장 기술이 발달했다. 집들은 젓갈 가게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996년 18곳이던 젓갈 가게는 매년 10여곳씩 늘어 현재 150여곳에 이른다.
강경포구는 금강과 그 지류인 샛강이 만나는 곳. 샛강을 따라가면 일제 때 만든 갑문과 1925년 세워진 강경노동조합 건물이 나온다. 당시 조합원 780여명. 위세당당하던 조합 건물은 이제 짠내가 밴 창고로 쓰인다. 공원으로 조성된 조합 앞마당은 다카하시 정미소 자리다. 논산평야의 알곡은 여기서 도정돼 일본으로 실려 나갔다.
강경의 심장은 바로 이곳이었다. 돛단배들이 위풍당당하게 입항하고, 우마차와 손수레가 바쁘게 역전을 오가고, 등짐장수와 야바위꾼, 약장수가 한데 흥성거리며 객주들이 수염을 날리던 곳. 강가의 집들은 술집이거나 새우젓 가게였고, 또 요정이었다. 조선의 물자가 여기 모였고, 오랜 기간 고스란히 배에 실려 일본으로 갔다.
강경은 다시는 그때만큼 흥성거리기 어려울 것이다. 1930년대초 1만3000여명이던 인구는 지금 1만4000여명이다. 한 시대의 박제 같은 도시. ‘왕년의 포구’엔 마침 배 서너척이 정박돼 있었다. ‘맛깔젓 2·3·4호’다. 강변을 따라 갈대가 피었고, 잔디가 깔린 둔치에서는 아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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