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길은 나를 이끌었다 상처의 흔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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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10.12 09:12:11
  • 조회: 266
길에 관한 이야기 하나 하자.
강원도 정선에 운탄길이란 길이 있다. 강원랜드 카지노 뒷산길. 과거 석탄을 운반했던 길이라 운탄(運炭)이란 이름이 붙었다. ‘자무시’라고 불리던 GMC 트럭에 석탄을 싣고 나르던 이 길의 길이는 강원도 정선 구간만 80㎞가 조금 넘는다. 얼마 전 강원랜드가 이중 10㎞ 구간을 트레킹 코스로 개발했다. 해발 1000~1200m 고지에 뚫린 임도라 강원도 심심산골을 둘러싸고 있는 암팡지고 다부진 산자락들을 길섶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최근엔 트레킹 대회도 열렸고 풍광도 제법 좋다.
지난 주말 운탄길을 찾았다. 길바닥은 거무잡잡했다. 수십년 동안 탄을 싣고 내가며 흘린 석탄알갱이가 땅바닥 여기저기 박혀있다.
길은 그 자체가 역사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루통은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를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다’고 했다.
이 세상 구석구석을 떠돌다 사북의 막장까지 들어온 어느 탄부가 탄가루에 숨을 쌕쌕 몰아쉬며 드릴을 박았을 법한 갱구 역시 돌로 막혀 있다. 십수년 전에 심었을 법한 자작나무는 돌섶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지 아직도 작달막했다. 탄광은 문을 닫았지만 그 흔적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운탄길 주변엔 ‘사형선고’를 받아 구멍이 막혀버린 갱도들이 그물망처럼 퍼져 있다. 강원랜드 주변 산자락에만 갱구가 10여 개. 한 구멍은 대개 수직으로 4㎞를 판다. 수직 갱도는 50m마다 수평으로 갱도를 하나씩 뚫는다. 이 수평길 역시 4㎞까지 뻗어간다. 떡갈나무 이파리의 잎맥만큼 많은 갱도들이 운탄길 밑에 숨어 있는 것이다.
운탄길에서 한 발짝 비켜 앉아있는 도롱이 연못은 파묻힌 이 지하갱도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습지다. 갱도 내의 세월에 삭은 버팀목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고, 이 때문에 땅이 꺼져 물이 차오르면서 연못이 됐을 것이라고 한다. 탄부들이 잘라낸 이끼 덮인 나무들이 못 위에 떠있는 모습은 원시림처럼 느껴진다. 호수만 보면 로키산맥 인근의 호반이라고 해도 믿을 법하다. 도롱이 연못이란 이름은 도롱뇽알이 많이 발견됐기 때문에 강원랜드가 붙인 것이다. 도롱뇽은 1급수에서 서식한다. 갱구에서 탄가루를 머금은 검은 물을 토해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용도 폐기된’ 산으로 여겼겠지만 자연은 놀랍게도 상처를 스스로 회복해가고 있는 것이다.
운탄길의 경사는 급하지 않다. 각이 지고 날카로우면 탄차가 오르내릴 수 없다.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가풀막이 없다. 운탄길은 산을 향해 열려 있다. 사실 길은 점과 점, 즉 공간과 공간의 연결이다. 길은 선(線)이다. 요즘 뚫는 새길은 터널을 뚫고, 다리를 놓아 쭉쭉 뻗어있지만 옛길은 산허리를 끼고 돈다. 산겨드랑이를 파고 들다가 다시 길이 열린다. 운탄길이 석탄때가 짙게 밴 검은 길이지만 운치가 있는 것은 휘었다 풀어지고, 다시 감는 리듬감이 있기 때문이다. 직선이 아니라 완만한 곡선이라 날카롭지 않다. 게다가 높낮이가 급하지 않아 걷기에도 좋다.
길에도 귀천(貴賤)이 있다면 운탄길은 주목 받지 못한 천한 길이었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길도 등급을 매기는 세상이다. 조선시대 문경새재길은 영남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대로로 국가에서 관리했다. 현대에도 길은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 등으로 나뉘어 있다.
탄광이 생기기 전 운탄길에는 화전민들이 들락거렸다. 운탄길 끝자락 고갯길의 옛 이름은 화절령이다. 봄이면 처녀들이 꽃을 꺾으며 넘던 길이란 뜻이다. 석탄산업이 활황이던 1960~70년대에 화절령 고갯길에 석탄길이 이어졌다. 당시에도 도회지 사람들은 운탄길이란 이름조차 몰랐다. 하기야 알 필요도 없다. 먹고 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막장인생들만이 이 길섶에 주저앉아 첩첩산 겹겹구릉을 내려다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탄가루를 씻어내기 위해 비곗살에 탁배기를 벌컥벌컥 들이켰을 법한 이 검은 길이 이제 트레킹 코스로 알려지면서 평일에도 하루 50~60명이 찾는단다. 세상사 돌고 돈다는 것이 사람뿐 아니라 길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걷기 좋은 가을이다. 정선 운탄길, 설악이나 지리준령만 못하더라도 충분히 걸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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