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현장에서 만난 여성 … 배인숙 중부여성쉼터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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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9.05 09:37:31
  • 조회: 527
아이가 대학만 들어가도 더이상 남편 시집살이 않고 편히 살겠다고 이혼서류를 내미는 중년여성들, 성형수술과 자기개발로 항상 젊고 탄력있게 사는 나우(NOW)족, 공부·스포츠·시험 등 전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알파걸’... 요즘 매스컴에서 표현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당당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 한켠에는 아직도 남편에게 맞아 심신이 멍든 폭력피해 여성들이 너무도 많다.

한국여성의 전화에서 오갈 곳 없는 폭력피해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만든 지 20년, 가정폭력금지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폭력피해 여성들의 수는 줄지 않고 신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래서 20년동안 폭력피해 여성들을 상담해주고 보듬어주는 일을 해온 배인숙관장(서울여성의 전화 부설 중부여성쉼터 관장)의 커다란 눈가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어지간히 맞아서는 쉼터에 찾아오지도 않아요. 목뼈를 다쳐 기브스를 한 여성, 발이 부러져 목발을 짚고 온 여성, 송곳에 찔리거나 담뱃불로 지진 상처를 입은 여성들을 숱하게 많이 봐서 무뎌질만도 한데 그들의 사연을 들으면 너무 딱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요. 맞아보지 못한 이들은 ‘맞을 짓을 했겠지’ ‘죽기살기로 한번 맞붙어보면 남편 버릇을 고칠 텐데’ 등의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편견과 몰이해가 폭력피해여성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배관장은 남들이 보기엔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다. 소위 유복한 가정에 자라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일류대 출신에 직업도 안정적인 남편을 만나 가정을 꾸린 아무 걱정없는 주부였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서 우리 가정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가부장적 제도와 남성우월주의 등을 느끼면서 여성학과 상담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여성의 전화를 찾았다. 그러다 쉼터와 인연을 맺었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둬야지” “올해까지만 해야지”라고 다짐하면서도 20년째 폭력피해 여성과 함께 하고 있다.

‘쉼터’란 여성의 전화가 아내구타 상담을 시작하면서 구타당하는 여성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폭력남편을 떠나 안전하게 피신할 장소를 마련한 것. 초기엔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한 피해여성들을 자원봉사자의 집에서 잠시 머물게 하기도 했단다. 1987년 3월, 방 3개의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사무실의 온돌방 1개를 ‘쉼터’라고 이름붙이며 국내 최초로 폭력피해 아내들이 쉴 수 있는 곳을 만들었는데 그 후 쉼터는 구타당하는 여성들을 위한 피난처를 지칭하는 일반 명사가 되었다. 현재 국내에 50여 개소의 쉼터가 있어 피해여성들을 위한 개별 상담, 집단 대화치료, 기술교육과 취업 알선 등의 일을 맡고 있다. 하지만 가정폭력관련 업무가 2001년부터 여성가족부로 이관되고, 정부가 쉼터 운영에 개입하면서 쉼터에 있는 여성들이나 담당자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정부에서 운영비용을 주니까 밥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제출하라는 보고서가 워낙 많아서 쉼터 여성들을 제대로 상담할 시간이 없어요. 정부의 일이야 모두 자료나 서류로 판단되니까 그렇겠지만 우리는 낮에는 상담하고 밤에는 보고서 만드느라 24시간이 모자라요. 그러니 양질의 상담업무도 하기 어렵고, 월급에 비해 일이 많으니 떠나는 이들도 많죠. 쉼터에 온 여성들도 예전엔 자기들을 도와준다고 고마워하며 우리들의 말에 잘 따랐는데 이젠 ‘내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이런저런 것을 다 들어달라’고 주문사항이 더 많아졌어요.”

지난 20년간 땀과 눈물로 이어온 쉼터. 배관장은 현재 쉼터 제도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피해자 생계비 지원과 노유자 시설로의 전환문제라고 지적한다. 피해자 개개인의 자산조사를 시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생계비 지원여부를 결정하는 현 시스템이 폭력피해 여성들에게 도움이 안된다는 것. 집이 있다 한들 죽기 직전까지 맞아 맨발로 집을 나온 여성들에게 그 집은 경제적 의미가 없다. 또한 자산조사를 통해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생계비를 받을 경우 집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수급이 안 된다는 사실은 쉼터 입소여성으로 하여금 생계비 지원을 포기하도록 한다.

“가정폭력을 피해 쉼터에 온 여성들에겐 위기 관리로 접근해야 합니다. 냉정한 법적 기준도 중요하지만 정상참작을 해야한다는 거죠. 쉼터를 관리하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구타를 견디지 못해 쉼터에 왔다가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면 그대로 집에 들어가 다시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맞아서 노동을 할 수 없고, 혹은 그래도 남편에게 돌아가면 밥을 먹을 수 있으니까, 또 남편이 다시는 안 때린다는 말을 믿고 돌아갑니다. 하지만 너무 오래 학대를 당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도망가도 다시 붙잡힐 거란 공포감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여성들이 너무 많아요.”

또 제도화 이후에 쉼터를 건축법상 노유자 시설(아동, 노인, 그 밖의 사회복지시설 및 근로복지시설)로 전환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노유자 시설이 될 경우 5층 이상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야 하는데 규정대로 하려면 거액을 들여 엘리베이터 설치공사를 하거나 공사가 필요 없는 건물 1층으로 이사를 해야 한다. 이와 함께 제도화 이후에 공공문서 등에 쉼터 위치가 드러나는 것도 배관장은 걱정했다.

“가정폭력 피해여성은 구타남편에게 쉼터의 위치가 공개되면 언제 붙들려갈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요. 불안, 공포, 자아상실, 무기력 등이 공통적 특징이죠. 그래서 쉼터 주소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게 철직입니다. 그런데 신고필증에 쉼터 주소가 반드시 기재되어야 하는 문제(법인주소로 대치불가능), 시설 고유번호증 발급을 의무화하여 시설 주소 노출을 일상화 한 문제 등은 아직도 가정폭력 피해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에요.”
사실 가정폭력이 얼마나 심각한 상처를 주는지, 어떤 여성들이 쉼터에 입소해 있는지 궁금해 쉼터를 취재하고 싶었으나 여성의 전화 관계자들은 절대 안된다고 했다. 가명을 쓰더라도 개인신상이 공개되면 몸은 물론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 있다는 배려에서 취재를 거부했다. 배관장을 비롯한 쉼터 관계자들은 이처럼 쉼터를 찾은 어느 여성에게도 완벽한 보호와 치료를 해주려고 애쓰지만 정부는 물론 사회의 배려는 여전히 부족한 편이다. 8월 3일부터 여성의 전화, 가정폭력상담소 등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로 개정된 새로운 가정폭력특례법이 시행됐지만 핵심인 경찰의 긴급체포 내용이 빠져 있다. 가정폭력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도 이미 폭행이 끝난 경우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경찰이 가고 난 후에는 ‘남편을 경찰에 신고했다’며 2차 보복폭행까지 당하는 경우가 많아 배관장은 ‘경찰의 초기대응 강화와 함께 가해자를 조사·격리시킬 수 있는 가정폭력특례법 재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20, 30년을 거의 매일 구타당해도 ‘매맞는 여자’로 불리는 것이 두려워, 또 자식들을 떠나지 못해 식물인간처럼 지내는 여성들이 아직도 수두룩해요. 수십년 간 맞고 살다 어느 한순간 분노가 폭발해 맞대응했다가 살인자가 되는 여성들도 있죠. 쉼터는 구타로 인해 무기력해진 이들에게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아주고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주는 곳입니다. 제발 가정폭력이 사라져서 제가 쉼터를 떠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폭력피해 여성들과 울고 웃으며 20여년을 보내느라 정작 가정생활에는 소홀했다는 배관장. 그래도 친정오빠가 ‘장하다’고 인정해줘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때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란 어리석지만 가장 기초적인 질문을 했을 때 배관장은 간단명료한 답을 했다.
“폭력엔 36계 줄행랑이 최고에요. 일단 피해서 내 몸을 지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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