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능청스러운 성인용 잔혹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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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8.10 09:13:03
  • 조회: 387
영화 가로지르기 ‘폭력의 역사’

‘폭력의 역사’(감독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수상한 인물들이 중산층의 안온한 일상에 난입하면서 시작된다. 두 명의 강도가 톰 스톨(비고 모텐슨)의 조그만 음식점에 침입한다. 스톨은 단번에 강도 둘을 해치우고 유명인사가 되지만, 그것은 도리어 낯선 자들의 불길한 방문이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스톨이 악명 높은 마피아 조이 쿠삭일 것이라고 확신하는 칼 포카티(에드 해리스)와 그의 부하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스톨의 형은 대저택에 사는 기업적 마피아다. 정말 마피아 조이 쿠삭이 평범한 소시민 톰 스톨로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폭력의 역사’에는 사실적인 폭력 장면이 가득하다. 하지만 영화는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다. 폭력으로 인한 신체의 훼손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영화의 마지막에는 기이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이 등장한다. 현실과 환상의 대표적 경계는 이미 영화의 도입부에 존재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작은 음식점을 주된 범행 대상으로 삼는 잔인한 두 명의 강도가 등장한다. 이들은 작은 음식점에 침입하여 주인 부부뿐 아니라 그들의 어린 딸까지 살해한다. 이처럼 영화의 도입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폭력을 정직하게 고발하지만, 이후부터 크로넨버그는 허황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전개해 나간다.
스톨이 형의 대저택을 한밤중에 방문할 때 관객은 이 영화가 능청스러운 성인용 동화였음을 마침내 깨닫는다. 신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는 그곳은 영락없는 동화 속의 성이기 때문이다. 스톨과 그 아들도 동화의 주인공처럼 비밀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가령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스톨의 아들은 어느 순간 놀라운 완력을 발휘하며 상대방을 제압한다. ‘폭력의 역사’는 폭력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는다. 스톨의 신체적 능력을 신비화하는 것에서 드러나듯 영화는 그저 중산층을 위한 성인용 동화에 불과하다. 폭력의 잔혹성을 가감 없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장면은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그것은 동화 같은 이야기에 그럴 듯한 사실감을 부여하려는 연출상의 전략으로 보일 뿐이다.
‘폭력의 역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혈통의 문제다.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을 간단히 제압하는 아들은 스톨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다. 스톨도 자신의 혈통을 부인하지 못하고 결국 형을 찾아간다. 사실 동화 속 왕자의 이야기는 대개 혈통에 관한 이야기다. 왕자가 왕자인 이유는 왕의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재벌이나 마피아는 흔히 현대판 왕조에 비유되지 않는가. 즉 영화의 제목 ‘폭력의 역사’의 역사는 폭력의 화신 톰 스톨의 혈통과 이력을 의미한다. 감독은 스톨이 가정으로 복귀하는 장면을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혈통 이야기에 스며 있는 환상성을 애써 감추려 한다. 하지만 무참히 숨을 거둔 도입부의 음식점 주인과 비교한다면 악한들을 손쉽게 해치우는 스톨의 이야기는 그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뿐이다.
영화의 대저택이 신비로운 성이라면 등장인물들은 스톨을 그 성으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그래서 스톨을 위협했던 두 강도는 마치 왕자가 자신의 신분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동화 속 요정 같고, 포카티는 왕자를 성으로 모셔오기 위해 행차한 시종장 같다. ‘폭력의 역사’는 마피아 집안의 혈통을 재확인하는 이야기이자 왕자 스톨이 성으로 귀환하는 이야기다. 동시에 마피아에 대한 동경과 지루한 일상에 대한 환멸이 결합되어 탄생한 잔혹 동화다. 영화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기보다 그저 마피아의 혈통과 관련한 동화적 몽상을 펼쳐 놓는 데 만족할 뿐이다. 흔히 동화는 억눌린 욕망과 실현되지 못한 소망을 담는다. 소시민이 기업적 마피아 출신으로 밝혀지는 이야기에는 신분상승의 뒤틀린 욕망과 남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일탈적 충동이 함께 담겨 있다.
비범한 혈통이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동화의 특징이다. ‘폭력의 역사’는 혈통과 신분을 둘러싼 계급적 몽상이 얼마나 인기 있는 영화적 소재인지 잘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에는 마피아에 대한 유아적 동경이 녹아 있다. 거창한 제목과 달리 ‘폭력의 역사’는 중산층의 욕망과 공포를 유치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투영시킨 성인용 동화에 불과하다. 중산층의 무기력한 일상이 폭력에 관한 자극적 상상을 유발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자신이 거대한 마피아 집단의 일원이었고 그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그것은 중산층에게 끔찍한 악몽일까, 아니면 한 번쯤 꿈꿔 본 매혹적 환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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