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져/여행] 그녀는 나에게 여행을 제안했다[박주영 콩트 ‘여름휴가와 책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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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7.16 08: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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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주 오래 전에 내게서 가져간 책을 찾았다고 했다. 자기가 가지고 있되 자기 책이 아닌 책을 그녀는 종종 내 책이라고 주장하며 돌려주곤 했다. 그녀가 가지고 온 책은 세월의 먼지가 쌓여 빛이 바랜 기형도의 산문집이었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익숙한 글씨체로 날짜가 쓰여 있었지만 이 책이 내 책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자매냐, 나아가 쌍둥이 아니냐는 말을 종종 듣는 그녀와 나는 글씨체도 몹시 비슷했다. 어쨌든 그녀와 나, 둘 중 한 사람의 책이 틀림없긴 했다. 책의 소유에 연연하는 나와는 달리 늘 떠나기를 꿈꾸는 그녀였기에 결국 책은 대부분 내 차지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두고 간 기형도의 짧은 여행의 기록을 펼쳐보았다. 그 책의 갈피에는 엽서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엽서가 꽂혀있는 페이지를 가만히 읽어보았다. ‘사실 이번 휴가의 목적은 있다. 그것을 나는 편의상 ‘희망’이라고 부를 것이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나는 그 엽서를 꺼내 메모판에 붙여놓았다. 새파란 하늘, 새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게 기른 여자가 여행 가방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여자는 맨발로 하얀 모래사장을 언제까지이고 걸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나에게 여행을 제안했다. 그녀는 돈과 시간을 아껴 기회가 될 때마다 여행을 가는 타입이었고, 시간이 늘 많은 나는 돈이 되면 따라나서는 쪽이었다. 나는 이번 여름휴가의 목적지가 내심 바다이길 바랐지만 섬나라의 도시였다. 여행 가방을 꺼내 묵은 먼지를 털고 짐을 챙겼다. 아이팟, 카메라, 청바지와 티셔츠, 간단한 화장품 등등을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을 골랐다. 여행의 행적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하는 것은 몇 년,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 몇 초까지 기록되는 디지털 카메라의 사진이지만 여행의 추억을 미묘하게 확장시키는 것은 책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책의 열망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고 싶은 여행의 욕구를 닮았다.
그녀와 나는 다른 나라,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여름의 태양은 뜨거웠고 사람들은 그 더위 속에서 묵묵히 어딘가를 향해 갔다. 그녀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움직였다. 지하철의 맞은편 사람들 중 반수 이상이 책을 읽고 있다는 점이 내가 떠나온 도시와 달랐다. 내가 떠나온 도시에서는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 중 겨우 한 사람이 책을 읽을 수도 있을 뿐이다. 그들처럼 나도 책을 꺼내든다. 책은 읽는 사람에게 그 안의 세계에 완전하게 몰두하기를 요구한다. 여행이나 휴가도 마찬가지다. 떠남으로써 떠나온 모든 것을 잠시나마 완전히 잊고 기꺼이 즐기라고 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나라의 말들, 마치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보이는 문자들, 그 모든 낯섦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가만히 앉아 마냥 책을 읽고 있어도 좋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그녀와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메라를 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무얼 찍으려고 저렇게 열심인가 싶었는데 그들이 기다리는 건 일몰인 듯했다. 예순은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 삼각대 위의 커다란 카메라 렌즈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해가 지도록 그녀와 나는 구경을 하고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사진을 찍던 그 할머니들을 그 지하철에서 보았다. 그 할머니들이 틀림없었다. 두 분은 쌍둥이처럼 똑같은 차림새였는데, 배낭을 등에 지고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삼각대 가방을 또 따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둘이서 끝없이 무슨 이야기를 했다. 이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그녀와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었고 그저 상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할머니들 아까 보니까 카메라랑 장비가 장난이 아니던데 사진작가일까?”
“저 나이에 둘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 좋아 보인다.”
그녀와 나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 나이가 된 우리를 떠올렸다. 나이가 든다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좋아하는 장소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할머니들은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우리가 그 나이가 되면 무엇을 원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게 된다. 내가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무엇을 그리워하고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는지. 여행의 마지막 날까지 그녀와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내일도 그러하듯이 이야기를 나누었고 누구 하나가 먼저 잠들면 나머지 한 사람은 책을 읽다가 잠들었다. 읽고 이야기하고 상상하는, 그 무엇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짧은 여행을 아쉬워하며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녀가 말했다.
“나, 사막에 갈 거야. 너도 같이 가자.”
“사막? 무슨 사막?”
“일단은 사하라나 시나이 같은 곳.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의 모든 사막.”
“저번에는 아프리카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니, 남극이었던가? 또 무슨 바람이 분거야?”
“이 책에 쓰인 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어.”
그녀가 말한 책은 자신을 바꾸겠다는 열망으로 길을 떠난 한 남자의 행적을 그린 소설이었다. 그 여행의 코스들은 처음에는 계획적이었으나 여행이 계속될수록 무질서해지고 즉흥적이 된다. 그가 간 곳들 중에 사막도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책의 어디쯤에서 사막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남자가 발견한 것이 결국 사막이었잖아.”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남자가 마지막에 간 곳은 바다였다.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앉아서 남자가 아침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세상의 어떤 곳에서는 바다에서 사막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긴 여행의 길 위에 서 있다. 사막이든 아프리카든 남극이든 아주 멀리 아주 오래 여행을 가게 된다면 나는 단 한 권의 책만을 가져갈 것이다. 그리고 그 단 한 권의 책을 여행하는 동안 내내 읽을 것이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여행의 시간과 함께 내 몸에 완전히 흡수시킬 것이다. 어쩌면 그 한 권의 책은 아직 쓰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어떤 여행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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