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고궁을 숨쉬게 하다[전통행사 기획·연출 ‘예문관’박성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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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6.19 09: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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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에서 도포 자락을 볼 때마다 궁금했다. 붉은 철릭(무인용 두루마기)을 입은 저들은 직업난에 ‘덕수궁 수문장’이라고 쓸까, ‘서울시 공무원’이라고 쓸까. 답은 ‘예문관 소속 연기자’였다.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은 전통문화행사를 기획·연출하는 예문관에서 맡아 진행한다. 수문장의 ‘배후’에는 예문관 박성진 대표(48)가 있었다.
지난 7일 운현궁에서 만난 박대표는 철릭도 한복도 아닌 감색 정장 차림이었다. “개량한복을 한번 입어봤지만 배도 나오고 해서 안 어울리더라”며 머쓱해 했다. 운현궁은 예문관이 서울시에서 위탁받아 관리하는 곳. 매년 4월 고종·명성황후 가례 재현 행사가 열린다. 박대표는 “시골에서 어르신을 모시고 보러 올 만큼 화려한 행사”라고 했다.
그뿐 아니다. 보신각종 타종행사, 남산 봉화 재현, 영월 단종 문화제, 조선시대 과거 시험 재현, 전통 성년식 등도 예문관에서 기획·연출한다. 서울 시내나 지방 축제장에서 펼쳐지는 전통문화 재현 행사 대부분이 그의 손을 거치는 것이다. 최근 행사로는 지난달 경북 안동에서 열린 서애 유성룡 ‘서세(逝世·별세)’ 400주년 기념 고유제를 꼽았다. 노론·소론·서인·남인 할 것 없이 전국 유생 1000여명이 한자리에 모였다고 한다. ‘서세’ ‘노론’ ‘율곡’ 같은 단어를 술술 주워섬기는 그는 성균관대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를, 중국철학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한 학자 출신이다.
낡은 서책이 어울릴 것 같은 학자가 전통문화 기획자로 ‘변신’한 것은 15년 전, 1992년의 일이다. 성균관 기획실장이던 박대표는 서울 정도 600년 기념행사를 열어달라는 서울시의 요청을 받고 알성시(과거시험)를 재현했다. 행사장에서 그는 눈을 비벼야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유생들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한시를 짓고 있었다. 세상이 바뀐 줄도 모른 채, 혹은 남몰래 한학을 공부해 온 이들이 엄연히 존재했다.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강제로 단절된 전통문화의 흔적이었다. 우리 문화는 “옛길 가다가 갑자기 고속도로를 만난 격”이었다. 박제돼버린 전통문화, 조선문화를 복원키로 했다.
600년 고도 서울. 그러나 궁궐은 “껍데기만 남았고 알맹이는 모두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읽고 있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펼쳐들면 장(章) 하나하나가 의례의 법도와 순서를 기록한 시나리오로 보였다. 유학과 철학을 공부한 학교 선·후배들을 모아 94년 전통문화행사를 기획·연출하는 예문관을 만들었다. 96년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시작으로 왕세자 책봉의식, 운현궁 고종·명성황후 가례, 성균관 석전대제, 단종문화제, 수원화성행궁 혜경궁 홍씨 회갑연 등을 차례로 연출했다.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옆구리에 끼고 전통복식·무용·음악·음식 전문가들을 찾아 다녔다. 꽃 장식 하나까지 수월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10여년을 뛰었더니 “한 임금이 평생 살 만큼의 의복과 장신구”는 갖춰졌다.
박대표는 왕실복고주의자는 아니다. 단지 우리 궁중문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졌을 뿐이다. 단종문화제를 연출하기도 한 그는 “숱한 사람이 이데올로기 하나만으로 죽고 열사와 충신, 열녀를 배출한 단종 이야기는 세계적인 콘텐츠”라고 말했다. 단종이 유배된 영월 청령포에 수변 무대를 설치하고 조명과 음악을 동원해 한국 비극의 원형을 보여주고 싶다는 그는 “단종은 오페라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다”고 강조했다.
‘오페라 단종’이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 돈 때문이다. 전통문화 재현 행사 대부분이 지자체의 재원으로 이뤄진다. 기업체의 후원도 거의 없다. 예문관도 봄 1개월, 가을 3개월에 집중되는 행사만으로는 19명의 직원을 먹여 살릴 수 없다. 그래서 새로 짓는 문화관이나 박물관의 설계 자문도 겸하고 있다.
박대표는 요즘 들어 왕실과 조선문화의 데이터베이스화 작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0여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화행사를 유형별, 규모별로 정리하고 있다. 최근 속속 복원되는 관아, 동헌, 성곽 등이 하드웨어라면 ‘경상감영에서 할 수 있는 행사 30여가지’ 등으로 적합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겠다는 것. 행사의 내용과 순서는 물론 복장과 음식까지 완벽하게 갖추어진 시나리오를 만들 계획이다. 그는 10년을 내다보고 있다. 아직까지는 연구·재현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궁중문화, 전통문화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상품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그에 앞서 그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한다. 경복궁, 덕수궁, 남대문에서 따로 또 같이 열리는 수문장 교대식은 아직까지 “초라한” 수준이다. 지난달 하이서울페스티벌에서 ‘조선시대 순례대열의식’을 기획하면서 그는 가능성을 봤다. 200여명이 단술을 걸치고 무기를 들고 광화문을 지날 때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수문장 교대식이 영국 버킹엄궁 근위병 교대식 같은 무형의 경계표가 될 수 있다.
처음엔 어색하던 그의 양복과 운현궁이 나중엔 그럴 듯해 보였다. 박대표는 과거의 옛길과 현재의 고속도로를 온몸으로 잇고 있었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 양복과 고궁은 그에게 썩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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