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동로마제국-‘반쪽 서양사’를 완성하다[비잔티움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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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5.03 09: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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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반전을 거듭하는 드라마를 보는 듯한 진한 영상이 머릿속에 영롱하게 그려진다. 88명의 비잔티움 제국 황제,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궁중 음모와 권력 암투, 암살과 쿠데타, 영웅과 여인, 장군과 악당, 전쟁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기기묘묘한 전략전술과 외교의 세계가 살아 꿈틀거리듯 펼쳐진다. 여기에다 비잔티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상(聖像) 논쟁, 헤시카슴과 동서교회 통합논쟁 등이 짜릿하게 곁들여진다. 비잔티움의 대명사인 화려하고 현란한 예술세계도 맛깔스럽게 버무려진다.
수려하면서도 호쾌한 필치는 ‘역사의 인디애나 존스’를 자처하는 저자의 호기(豪氣)가 결코 무색하지 않다. 외교관 출신의 영국 역사가 존 노리치는 3부작 ‘비잔티움 연대기’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처럼 학술적인 권위의 중압감을 애초부터 벗어던진다.
이 책은 비잔티움 연구의 신천지를 개척하려는 전문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전문가를 위해 번득이는 서술감각으로 흥미진진하게 쓴 대중 역사서의 묘미가 상큼하다. ‘비잔틴 제국의 역사’를 쓴 정통사학자 워렌 T 트레드골드가 이 책을 ‘통속적인 저서’라고 깎아내린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경박하리라는 선입견은 금물이다. 노리치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미시사를 놓치지 않는 치밀성을 보여준다. 등장 인물의 얼굴 표정, 개성, 별명의 특성, 무궁무진하고 별난 일화에 이르기까지 아기자기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200자 원고지로 따져 7000매가 넘고 3권을 합해 22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보자마자 질려 버릴 듯하지만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 교호작용하면서 엮어내는 이야기에 누구라도 이내 푹 빠져들고 말 것 같다.
‘문명은 비잔티움에 빚을 지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대뜸 이런 제목으로 시작한다.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자 헌사(獻詞)가 아닐까 싶다. 아니 비잔티움을 제대로 대접해 주자고 외치는 목소리다.
비잔티움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으로부터도 외면당해 왔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관해 모호한 인식밖에 갖고 있지 않다. 웬만한 교과서들은 아직도 비잔티움을 단 몇 장으로 간추려 버리고 만다.
이 책은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계몽주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과 ‘유럽 도덕의 역사’의 저자인 아일랜드 역사가 W E H 레키에 대한 도전장이다. 기번은 비잔티움 제국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간직했던 모든 미덕에 대한 배신”이라고 매도했다. 레키는 “성직자, 환관, 여인들의 음모와 독살, 반역, 배신과 친족 살해 등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문명세계에서 가장 경멸스러운 역사”라고 비하했다.
‘비잔티움 연대기’는 역사의 승자였던 서로마 제국에 가려 이처럼 홀대를 받아 온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재조명한 것이다. 비잔티움의 명예회복은 반쪽짜리 서양 역사를 완성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숨쉰 제국, 그러면서도 역사의 응달 속에서 쭈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비잔티움의 역사를 노리치는 이 책에서 곡진하게 그려 양달로 끌어냈다.
3부작의 1권은 ‘창건과 혼란’이란 소제목이 말해주듯 숨이 넘어가는 로마 제국을 구해내기 위해 동방과 서방으로 분리한 디오클레아누스 황제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막을 연다. 그 뒤를 이어 비잔티움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법제를 완성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삼국지’의 조자룡을 연상시킨다는 제국 역사상 최고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장엄한 삽화를 거쳐 800년 비잔티움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샤를마뉴가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는 일로 이어진다.
2권 ‘번영과 절정’에서는 그리스의 정신, 로마의 몸, 동방의 영혼이 교직되어 전성기를 구가하는 비잔티움의 화려하면서도 잔혹한 세기가 펼쳐진다. 레오 6세, 바실리우스 2세 같은 위대한 황제의 열전이 주로 전개된다. 영웅의 풍모를 갖춘 인물이든 괴물 같은 사람이든 비잔티움 황제들은 흥미 만점의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이 책이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저자의 글솜씨 외에도 소재 자체가 이처럼 진진하기 때문이다.
‘쇠퇴와 멸망’을 담은 3권은 십자군이 그리스도교 제국을 쇠망으로 몰아넣는 아이러니와 오스만투르크의 공격 앞에서는 필사적인 항전도 무위로 돌아가 ‘피의 그믐달’이 뜬 날 천년사직의 막이 내리는 장면을 비감하게 그린다.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수도를 옮긴 330년 5월11일에 시작돼 1453년 5월29일 오스만투르크에 멸망할 때까지 정확히 1123년 18일 동안 존속했다.
이 책은 유고슬라비아 역사가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의 명저 ‘비잔티움 제국사’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이 책이 수많은 이야기의 집합이라면 ‘비잔티움 제국사’는 정치적인 면에 역점을 두고 기술해 나간다. 오스트로고르스키의 저서는 실증사학의 관점에서 비잔티움 역사를 기술한 표준적인 개론서에 해당한다.
이 책은 2000년 ‘종횡무진 동로마사’라는 제목 아래 3분의 1로 줄인 요약본으로 출간한 적이 있던 것을 이번에 온전하게 번역해 펴낸 것이다. 세계 최장의 역사를 자랑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욕을 적당한 두께의 책 한 권으로 다루는 것은 예의가 아닐 법도 하다.
경향신문 기사·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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