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새벽 1시반에 ‘점심’ … 시작도 끝도 없는 하루[‘24시간 미용실’의 2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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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4.30 09: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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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같이 하실래요? 저흰 지금이 점심이에요.”
새벽 1시30분에 들은 말 치곤 새로웠다. ‘야참’이 아니라 ‘점심’이다. ‘24시간 영업’ 미용실에선 새벽 1시에 ‘점심’을 먹었다. 출출하면 부침개도 부치고, 수제비도 떠 먹었다. “정이 그리운” ‘업소 언니’들이 오면 밥도 해 준다고 했다. 각박한 삶이지만 정이 있었다.
이화여대 앞 미용실 ‘PnG 헤어캐슬’을 찾은 것은 지난 14일 밤이었다. 한밤중에 머리하러 이곳을 찾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오후 11시, 미용실은 비교적 한산했다. 이미 술 몇 잔을 걸쳐 불콰해진 얼굴의 남자 2명과 함께 이곳을 찾은 전인숙씨(27·여)는 이 가게의 단골 손님이다. 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어 오후 8~9시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리를 하러 들르곤 한다. 서초동 가게에서 이대 앞까지 먼 길을 찾아왔다. “원래 이대 근처에서 장사를 하다 서초동으로 옮긴 지는 3개월 정도 됐어요. 멀어도 24시간 하는 데를 일부러 찾아서 오는 거죠. 우리 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때밖에 머리할 시간이 없잖아요.”
밤 12시쯤 들어온 유웅규씨(35) 역시 개인사업을 하고 있어 낮 동안에는 머리할 여유가 없다. 파마 롤을 말고 머리 주위로 도는 가열기 앞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그는 그동안은 주로 주말에 파마를 했다고 한다. 이 날은 단골인 친구에게 ‘24시간 하는 미용실이 있다더라’는 말을 듣고 친구를 따라왔다. 유씨는 “사람도 없고 한산해 좋네요. 오늘 해 보고 잘 맞으면 앞으로도 이 시간쯤 오면 좋을 것 같은데요”라고 말했다. 유씨를 데리고 온 친구는 ‘샴푸 서비스’를 받고 나가더니 두 손 가득 간식 거리를 사들고 들어왔다. 밤 근무 하는 동안 먹으라며 미용사들에게 과자며 음료수가 든 봉지를 내밀었다.
오전 1시쯤엔 전화가 울렸다. 근처 나이트 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단골이다. 새벽 5~6시쯤 일 끝나면 오겠다는 예약 전화였다.
오후 11시~오전 1시 사이에는 많지는 않아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장사하는 사람, 개인 사업가, 아르바이트 끝내고 온 고교생들,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스태프 말에 따르면 인천이나 수원에 살면서 서울에서 알바를 하는 중·고생들도 종종 이 곳을 찾는다고 한다. 일이 끝난 뒤 야간에 동대문에서 쇼핑을 하고, 이대 쪽으로 넘어와 머리를 한 후, 근처에서 출발하는 새벽 첫 차를 타고 다시 인천이나 수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자신이 하는 일과 시간이 안맞아 ‘하는 수 없이’ 이 시간에 미용실을 찾은 사람들이었지만, 이 중에는 전혀 다른 이유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한다는 장지영씨(24)는 왜 이 시간에 머리를 하러 왔냐는 질문에 “이 시간엔 차가 안 밀리잖아요”라고 잘라 말했다.
오전 2시쯤 방문한 이주미씨(28)는 “남편 몰래 나왔다”고 했다. 아침에 인천에서 친구 결혼식이 있는데 지금 미리 머리를 해 놓고 여유롭게 움직이려고 나왔단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느라 공부하고 그러다 보니 잠을 늦게 자는 편이에요. 아침 잠이 많아지죠. 그래서 다음 날 행사가 있거나 하면 항상 이 시간쯤 나와서 머리를 해요. 오늘도 목동에서 여기까지 왔어요. 남편 몰래….”
이씨의 머리를 손질하던 미용사가 농을 건넸다.“언젠가는 그런 사람도 있었어. 밤늦게 남편이랑 싸우고 갈 데가 없어서 미용실에 왔다는 거야. 그러면서 머리를 확 잘라달라고 하더라고. 언니는 싸우고 온 건 아니지?”
순간 주위는 웃음 바다가 됐다.
새벽 3~4시쯤엔 오히려 붐비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는 염색·파마·커트 중인 손님들, 주변의 의자에는 친구 따라 밤을 지새고 있는 이들로 가득했다. 이 곳에서 일하는 미용사들은 보통 매일 오전 1시에 한 번, 5시에 한 번 식사를 하는데, 이날은 ‘저녁 식사’도 거르고 일을 해야 했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불청객들도 종종 등장한다. ‘바바리 맨’이 들어오기도 하고, 도난 수표를 내거나 무일푼인 사람들도 가끔 있다.
새벽 3시쯤에는 만취 상태의 20대 여성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다짜고짜 “인터넷에서 전도연 머리를 찾아 그것과 똑같이 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눈은 반쯤 풀리고 혀도 꼬였다. 한참을 “꼭 전도연과 똑같아야 한다”고 떠들더니, 파마약을 바른 채 꾸벅꾸벅 졸다 이내 엎어져 잠이 들었다.
오전 6시.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동이 터온다. 하루의 끝과 시작이 겹치는 시간이다. 안민숙씨(35)는 세살배기 아이를 떼 놓고 편하게 머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이 시간에 미용실을 찾았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24시간 미용실’을 검색해 찾아왔단다. 몇 시간 후엔 아이의 생일 파티가 있다.
도로는 금세 자동차와 사람들로 가득해졌다. 미용실의 환한 등은 24시간 내내 꺼지지 않았다.
경향신문 기사·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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