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파도와 섬의 경계, 혼자다[남해 무인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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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3.22 09: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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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들은 서로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 들리는 거리에 있었다. 남해 다도해의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머물렀다. 하지만 남해 연안은 수많은 섬, 좁은 수로, 얕은 천소, 암초, 그리고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서 고깃배를 비롯한 선박이 드나들기가 불편하다. 아름다운 다도해 풍광의 이면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다.
남해 연안의 크고 작은 섬들은 뱃사람들에겐 이정표가 되기도 하지만, 악천후 속에서는 암초가 되기도 한다. 섬을 이정표로 보는 사람과 암초로 보는 사람의 차이는 그들의 경험에 근거한다. 한번도 배를 타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섬이 암초로 보일 리가 없고, 밤바다를 항해한 적이 없는 사람에게 등대는 절실하지 않다. 등대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영성의 불빛이 되기도 한다.
여수항에서 남해안의 무인도에 있는 무인등대를 관리하는 항로표지선인 여명 1호에 탑승했다. 허상선 선장이 이끄는 이 배에는 등대 점검원 윤병욱, 정채식씨를 포함해서 모두 9명의 선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예정된 일정은 여수항에서 출발해 백야도 등대, 주인여 등표, 탕건여 등대, 대두역서 등대, 하백도 등대, 소삼부도 등대를 거쳐 거문도에서 하루를 쉰다. 다음날 역만도 등대, 손죽도 등대, 지마도 등대, 무학도 등대, 중결도 등대, 시산도 등대, 계도 등대, 소록도 등대를 마지막으로 녹동항까지 이어진다. 이 모든 일정이 2박3일 안에 이루어진다.
출발하기 전에 배의 상태를 점검하는 선원들로 좁은 배 안은 분주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먼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배 안은 여러 시설로 꽉 차 있었다. 여객선은 여러번 탄 적이 있지만 항로표지선은 처음이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동소리가 우렁차게 울러 퍼졌다. 배는 항구를 떠날 때 한번, 항구에 도착할 때 뱃고동 소리를 두 번 울린다. 이러한 신호들이 질서를 유지한다. 고동소리만 듣고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일종의 항구의 법칙이다.
갑판에 나가자 사람들이 등을 보이고 사라진다. 나는 육지로 등을 돌리고 바다를 보았다. 어느 순간, 문득 뒤돌아서자 육지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바다뿐이었다. 배는 홀로 떠있었다. 배 안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도, 이 거대한 바다 위에서 배는 언제나 홀로 존재했다. 등대 역시 홀로 존재한다. 아직 불빛을 밝히지 않는 등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다가오고 있는 선박들이다. 배에게 그 빛은 밝은 길이다.
배를 조종하는 조타실에 올라가 낯선 항해 장비를 보았다. 승용차의 운전대와 같은 모양의 조타기, 컴퓨터 시스템으로 되어 있는 항로 표지, 나침반, 망원경, 소리를 내는 버튼이 보인다. 그리고 넓은 해도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다. 이 해도를 통해 선원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간다. 바다 위에도 인간은 선을 그어 길을 내고 있었다.
고산자는 두 발로 걸어 우리나라의 지도를 만들었다는데, 두 발로 걸어갈 수 없는 바닷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컴퓨터 모니터로 보이는 바닷길은 실감나지 않았고, 눈앞에 바로 보이는 바다는 막막했다. 과연 저 바다 위에도 길이 있는 것인가? 인간이 움직이는 모든 공간에 반드시 길은 있었다. 선장과 항해사의 대화가 들려왔다.
“오늘은 해무가 많이 끼어 시야가 좋지 않네?”
“대신에 바람이 없어 파도가 잔잔하네요.”
“바람이 불면 안개가 사라질 텐데.”
“그럼 파도가 높아 힘들지.”
“허허….”
안개가 자욱하다는 것은 바람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바람이 안개를 몰고 가면 파도가 높아진다. 오늘은 날씨가 좋다. 안개 역시 곧 걷힐 것이다. 배의 하부로 다시 내려와 식당칸에 붙어 있는 거실처럼 마련된 공간에서 커피를 한잔 타 마셨다.
여수항에서 멀어지면서 오동도 등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오동도 등대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었다. 그때 육지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등대는 역시 바다에서 보아야 한다. 바다에서 보기 편하게 만들어진 것이 등대이다. 오동도 등대가 점점 멀어진다. 덕담을 던지듯이 그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수도 없이 이 길을 다녔지만,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이요. 작가 양반은 운이 좋소.”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말한다.
“아따. 형님, 그런 말 마소. 그러다 파도가 듣것소.”
바다에서는 입바른 소리를 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장은 오랜 경험 탓인지 허허거린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 것이 바다 날씨다. 선장의 눈매가 매서웠다. 다부진 체격이었다. 나직나직하게 이야기하지만 왠지 힘이 넘친다. 시선은 항상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배의 앞머리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득하다. 먼 수평선에 간헐적으로 지나다니는 배들이 보인다. 큰 배도 있고 작은 배도 있다. 파도를 가르면서 나아가는 배가 가고 있는 곳은 섬이다. 아니 섬에 있는 무인등대이다. 배는 무인도로 가고 있다. 무인등대를 돌보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아픈 등대를 돌보러 가는 등대의사들이다.
백야도 등대 근처에 이르자 등대에서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면서 손을 흔들어댄다. 배에서도 선원들이 나와 모두 손을 흔든다. 바다에서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바다에서 사람을 만나듯이 육지에서 사람을 대한다면…, 그 사람이 소중한 것은 그 사람이 멀리 있을 때이다. 곁에 있어도 그립다는 말은 호사스러운 이야기다.
배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죽음으로 보이기도 한다. 육지에서 바라보기에 바다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먼 그리움이고, 아득한 풍경이라면, 바다 속에서 바다는 막막한 고독이고, 삶의 끝이며, 아픈 사람들의 영혼이 된다.
대두역서 등대에 잠시 닿았다. 작은 섬은 파도를 경계로 떠 있었다. 섬은 잠시 경계선이 된다. 파도에 일렁이는 것 같은 섬의 경계선이 흔들린다. 우리의 삶은 경계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무너진다. 몸은 육지와 같고, 마음은 바다와 같다. 섬의 해안선은 몸과 마음의 경계선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먼 바다가 멀려와 육지에 닿으면, 육지는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지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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