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빼어난 글 … 또 인간미에 무릎을 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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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7.03.14 09:30:04
  • 조회: 416
음력 칠월 열사흗날. 자정이 넘었으니 달이 더욱 밝다. 술을 마셔 크게 취했다. 벗들과 운종교 난간에 기대 즐거웠던 옛 일을 얘기했다. 다시 달빛을 밟으며 수표교까지 다다랐다.
“…다리 위에 줄지어 앉았다. 달은 바야흐로 서쪽으로 기울어 순수한 붉은 빛을 띠었다. 별빛은 더욱 흔들리며 둥글고 커져서,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질 듯했다. 이슬이 짙게 내려, 옷과 갓이 다 젖었다. 흰구름이 동쪽에서 일어나 옆으로 뻗쳐가다 천천히 북쪽으로 옮아갔다. 성 동쪽에는 청록빛이 더욱 짙어졌다.”(‘취해서 운종교를 거닐다’(醉踏雲從橋記) 중에서)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만났다. 연암 문학 선집인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를 통해서였다. 고백컨대 그 전까지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다. 일부 발췌된 글이나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말랑말랑하게 바뀐 것들로 접한 게 전부였다.
책은 연암 연구에 매진해온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가 스승인 우전 신호열 선생과 함께 완역한 ‘연암집’(전3권·돌베개)을 저본으로, 연암의 대표작 100편을 엄선해 실었다. 소설 10편, 산문 75편, 시 15수를 뽑았다. 지금까지 나온 연암 문학 선집 중에선 가장 많은 작품을 수록한 것이다.
20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연암은 한두 단어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운 모습이다. 놀랄 만큼 사실적인 묘사를 선보이고, 통념을 뒤짚는다. 글 짓는 법을 병법에 비유하며 고정된 작법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을 강조하기도 하고, 고라니와 파리를 예로 들어 사물의 크고 작음이 상대적임을 역설하기도 한다. 치통으로 고생하는 자신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기도 하고, 벗을 잃은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책은 연암 문학의 본령을 이루는 산문에 많은 면을 할애했다. 특히 연암의 독창적인 문학론이 드러난 서문을 그 앞부분에 뒀다. 연암은 박제가의 문집인 ‘초정집’에 붙인 서문에서 옛 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얘기한다. 이덕무의 문집 ‘영처고’ 서문에서 옛 중국 시를 답습하지 않고 지금의 현실을 참되게 노래한 이덕무의 시야말로 ‘조선의 국풍(國風)’이라고 극찬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연암은 “시대적 편견에서 벗어나 사물을 늘 새롭게 인식할 것”을 촉구했다. ‘북학의서’(北學議序)에선 “진실로 그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답다면 장차 오랑캐에게라도 나아가 배워야 하는 법”이라고 역설한다. 코끼리를 본 소감을 기록한 ‘상기’(象記)에선 가축밖에 본 적이 없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만물의 무궁한 변화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편역자가 ‘교만을 버려라’라는 제목을 붙인 ‘초책에게 주는 편지’(與楚책)를 보자.
“우리들은 냄새나는 가죽 부대 속에 문자 몇 개를 지니고 있는 것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데 불과하오. 그러니 저 나무에서 매미가 울음 울고 땅 구멍에서 지렁이가 울음 우는 것이 또한 어찌 시를 읊고 글을 읽는 소리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소.”
사실 일반 독자에게 좀더 살갑게 다가오는 건 연암의 감정이나 생활상을 진솔하게 그려낸 글들이다. ‘수소완정하야방우기(酬素玩亭夏夜訪友記)’에선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낸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기도” 하던 연암은 사흘 만에 밥을 얻어먹고 식곤증이 나서 누워 “행랑 것과 문답”을 나눈다. 남수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글(‘答南壽’)에서는 무료한 나머지 자신의 두 손을 편갈라 ‘쌍륙놀이’를 하는 모습을 전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난 큰 누님에 대한 추억과 애끓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르러 누님의 쪽 찐 머리 같고, 강물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고운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였다.”(‘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
연암의 시는 산문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을 준다. 스무살 무렵 정초에 지었다는 ‘설날아침에 거울을 대하고(元朝對鏡)’에선 “거울 속의 얼굴은 세월 따라 달라져도/철모르는 생각은 작년의 나 그대로”라며 학업에 정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수많은 고사를 인용하면서 동해에서 해가 돋는 장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 ‘총석정관일출’도 눈에 띈다.
책은 그야말로 연암의 뛰어난 문장력과 개성, 그리고 인간미가 숨김없이 드러나는 글들로 넘쳐난다. 연암이 왜 “우리 고전 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지 그 진면목을 맛보게 한다. 책을 덮고 나면 이번에 함께 나온 ‘연암집’ 완역본을 읽어 그를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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