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일상의 멋, 예술로[전계우 세미화랑 관장]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6.11.29 09:27:33
  • 조회: 519
주택가가 유흥가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좀 뜬다 싶으면 땅값이 오르고 주택은 곧 상업공간으로 변모한다. 주택이 없어진 자리에는 카페와 식당, 술집이 공간을 메운다. 신촌이 그러하고 근래에는 삼청동의 변화가 이를 증명한다.
대학로의 역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대학로에는 찻집과 서점 등이 주택과 공존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명동과 충무로에 군집해있던 소극장들이 비싼 땅값에 못 이겨 이곳으로 몰려오고 대학로가 조성되면서 풍경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주택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용적률을 최대로 높인 건물이 들어섰다. 지하에는 소극장이, 1층에는 카페나 밥집이, 2층에는 술집이 들어섰다.
그러나 아르코 미술관 바로 뒷골목에는 이같은 상업화의 흐름을 거부한 채 오롯이 서 있는 주택 한 채가 있다. 봄이면 흐드러지게 핀 자목련이, 초가을이면 연녹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나무가 행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여기가 원래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자리예요. 1970년대 중반에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가면서 정부로부터 이 땅을 분양받았어요. 저희가 한번 자리를 틀면 팔고 옮기는 걸 잘 못해서 남들은 다 이사가거나 집을 허물고 건물을 올렸는데 우리집만 아직 이렇게 그대로 있어요.”
집주인 전계우씨(66)의 설명이다. 사실 이 집은 겉보기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부에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외국 여행에서 사 갖고 온 각종 패브릭과 기념품, 서세옥 화백의 그림은 물론 집안 전체가 집주인의 애정과 정성이 담긴 물건들로 가득하다.
전씨의 모든 활동이 이뤄지는 곳은 길이가 3m는 족히 넘는 대형 식탁을 놓은 식당이다. 이 식탁은 밥상이면서 동시에 집주인의 작업대다. 그니의 취미는 옷을 만드는 일과 폐품을 재활용해 온갖 자질구레한 장식품과 공예품을 만드는 일이다.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고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지만 결혼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꿈을 접어야 했다. 대신 다섯 자녀의 옷을 만들어 입히고, 훗날 음악을 전공한 세 딸의 연주복을 만드는 것으로 그 꿈을 대신 이뤘다.
여태까지 만든 연주복만 40여벌. 기자가 방문한 그날도 전씨는 식당 한 쪽에서 딸의 연주복을 만들고 있었다. 전씨의 세 딸은 각각 작곡과 첼로, 바이올린을 전공했다. 작곡가로 활동 중인 첫째딸 이윤정씨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을 최고성적으로 졸업해 화제가 됐고 첼리스트인 둘째딸 숙정씨 역시 파리 유학을 거쳐 현재 연주자로, 교육자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전씨가 만든 연주복을 들여다봤다. 단순한 선과 전통적인 색감이 현대적인 디자인과 공존하고 있었다. 옷 만드는 이야기에 신이 난 그니는 차례로 연꽃을 그려넣은 부채와 온갖 상자를 보여줬다.
“이건 명절 때 꿀이나 차 등이 들어있던 나무 상자인데, 너무 버리기가 아까워서 여기다 나비 그림을 그려봤어요. 그랬더니 이렇게 예쁘잖아. 취미로 하나둘 만들어서 선물로 주고 그래요.”
남계우의 ‘화접도’에 못지않을 정도로 상자 위에 그린 나비 그림이 생생하다. 벽면에 장식으로 걸어둔 도자기 그릇에도 역시 나비 그림을 그려 구웠다. 나중에 맞이할 둘째며느리를 위해 함 상자도 직접 만들었다. 목공소에서 짠 나무 상자를 사포로 문질러 마무리하고 정성스레 화려한 모란 무늬를 그려넣었다. 그니의 두 딸은 결혼식 때 어머니가 직접 만든 족두리로 폐백을 치렀고 손녀딸 역시도 할머니가 만든 굴레를 쓰고 돌잔치를 치렀다.
옷뿐만이 아니다. 집안 전체에 그니의 미감과 감성이 묻어있다. 이런 감성을 썩히기 아까워서 집 옆 건물에 90년대 초반 세미화랑을 열었다. 그때만 해도 대학로에 스무 곳이 넘는 화랑이 있었다. 상업화에 밀려 이들 화랑도 거의 사라졌다. 사실 세미화랑도 거의 폐업상태다. 당시만 해도 신이 나서 좋은 전시, 자신이 열고 싶은 전시를 기획해 소개했지만 너무 매달린 나머지 지쳤단다.
대신 전씨는 이렇게 딸들의 옷을 만들어주고, 폐품을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 시시때때로 장아찌를 담가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눠준다. 그날도 아침에 담근 김장 김치와 장아찌를 상자에 넣어 보자기로 곱게 싸 대문 옆에 켜켜이 쌓아두고 있었다.
이렇게 나눔이 주는 힘과 기쁨을 알고 있는 전씨는 여러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이다. 7년째 맑은물사랑실천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아 한강의 상수원인 양평군민들과 함께 화학비료 안쓰기, 세제 안쓰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신 양평군민을 위한 음악회와 시낭송회, 전시회 등을 연다. “와인, 된장, 고추장 등은 희석하는 데 물이 많이 든대요. 음식물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환경운동이에요.”
유쾌한 집주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니의 나눔정신과 주변에 대한 애정이야말로 번잡한 대학로 거리에서 꿋꿋하게 이 집을 지켜낸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