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뜰정보] 영화 나없는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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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6.10.20 09:09:50
  • 조회: 191
23살의 어여쁜 앤(사라 폴리)은 조금 전 의사로부터 말기 난소암 선고를 받은 참이다. 제멋대로 눈물이 흐르지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녀에게 남아있는 시간은 길어야 2~3개월. 12살만 늙었더라면 암세포 진행이 더디기 때문에 수술을 해볼 수 있었다는 게 의사의 말이다. 하지만 젊은 그녀 안에 자라고 있는 종양은 걷잡을 수 없이 왕성하다. 숫기 없는 의사가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달콤쌉싸래한 생강사탕뿐. 생강의 날카로운 향이 혀를 찔렀지만 그런 촉각을 느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앤은 생각한다. 사탕이 더 먹고 싶어진다.
17살에 너바나의 마지막 콘서트에서 남자를 만나고 첫아이를 낳았을 때도, 19살에 둘째 딸이 생겼을 때도, 감옥살이를 하는 아빠를 10년 동안 만나보지 못했어도 삶의 무게는 앤을 외롭게 만들지는 않았다.
호텔 주방에서 일하는 엄마의 집 뒤뜰에 놓인 트레일러에 살림을 차려 6년 넘게 살고 있지만 남편과 두 딸은 사랑스러웠다. 대학교 건물 청소부로 일하고 밤늦게 돌아오면 남편은 차가워진 발끝에 입김을 호호 불어주곤 했다. 예쁜 두 딸은 아직 뗏목놀이를 같이 해줄 엄마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앤은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수첩에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들 10가지’를 적은 그녀는 엄마 혹은 아내, 또는 딸이 없는 가족의 인생을 말없이 예비하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앤은 외롭다.
젊은 여성의 시한부 인생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생명활동으로서 종양이 던져주는 혹독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삶을 반추한다. 주인이 젊을수록 몸 속의 암세포도 속절없이 빨리 자라난다. 앞으로 많은 사랑을 만들어갈 수 있었던 앤은 자신이 할 일들을 하나 둘 실천하면서 지워나간다. 안타까운 종양의 성장을 따라, 영화는 주인공에게 남아있는 행복을 절실하게 보여주면서 가진 것 없어보이는 앤의 소중한 것들을 세심하게 들춰보인다. 얼핏 상투적인 신파 멜로가 될 수 있었던 영화의 소재는 삶의 대척점들에 대한 차분한 관찰로 승화된다. 생명과 죽음, 일상과 일탈, 부모와 자식, 머무름과 떠남, 시작과 끝, 그리고 부부생활과 외도에 이르기까지.
앤의 짧은 여생에 개입하는 한 따뜻한 남자(마크 러팔로)는 같이 살던 여자가 가구를 다 가져가버린 휑한 집에서 살고 있다. 여자가 돌아올까봐 새 가구를 들여놓지 않는 남자는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앤의 눈에서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을 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남은 남자와, 떠날 날을 기다리는 여자는 각자의 상실감으로부터 비롯된 온기를 나눈다. 역시 가진 것 없어보이는 이들의 사랑을 통해 영화는 보편성을 띤 인간애의 가치를 보여주려고 애쓴다. 결국 남자는 주인공의 외도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삶을 이어받는 대상이다. 그래서 영화는 눈물을 강요하지 않은 채 수수한 희망을 전해준다.
올해 46살인 스페인 출신의 여성감독 이사벨 코이젯은 시한부 인생을 소재로 ‘끝’이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전과 다른 인생을 살면서 준비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새 삶이다. 이를 통해 관객은 생에 대한 감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올해 27살인 앤 역할의 사라 폴리는 과장되기 쉬운 캐릭터의 눈물을 꾸밈없이 연기한다. ‘유 캔 카운트 온 미’ 등에서 인정 많은 인물을 주로 맡아온 마크 러팔로의 따스한 눈길은 특별히 돋보인다. ‘그녀에게’의 아름다운 여인 레오노르 와틀링이 극중 앤이 남편과 짝지어주고 싶은 이웃집 여자로 등장해 눈길을 끌고, ‘스파이더맨2’의 문어발 박사 알프레드 몰리나가 앤의 아빠로 등장해 가족들에게 아무것도 못해준 채 한곳에 머물러 있는 이의 회한을 전한다. 미국에서 꽤 인기를 모았던 낸시 킨케이드의 단편소설 ‘침대를 뗏목 삼아’를 모티브로 삼은 이 영화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제작에 참여해 스페인 제작진과 캐나다 배우들이 손잡고 만든 2003년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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