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가을, 옛 음악에 젖다 [LP와 통기타, 내안의 로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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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6.09.26 09: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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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쯤 한 외국계 음반사가 창고에서 대방출 세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간 적이 있다. 평소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될 법한 창고에는 그 음반사 특유의 글씨체로 뮤지션 이름을 적은 LP 레코드가 수만장 쌓여 있었다. 철제 선반 위에 정리돼 있던 핑크 플로이드, 마일스 데이비스 등의 음반을 골라들었다. 계산을 하던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돈을 받아든 뒤 재판매를 막기 위해 펀치로 음반 재킷에 조그만 구멍을 뚫었다. 이 세일을 마지막으로 음반사는 한국에서 더이상 LP를 만들지도, 팔지도 않았다.

LP시대는 그렇게 한 음반사의 창고에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50년 가까이 지속된 영향력을 고려하면 너무나 갑작스러운 퇴장이었다. 아울러 오래 들어 잡음 섞인 LP에 어울리던 록과 포크 장르도 힘을 잃어갔다. 눈을 감았다 뜨니 모든 게 사라졌다.



◇LP에서 MP3로

1948년 처음으로 시중에 나온 LP레코드는 음악 기록 매체로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깨지기 쉽고 보관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지만, 이러한 특성은 역으로 음악팬들이 LP를 소중히 다루는 계기가 됐다. 얇은 LP가 빽빽이 들어찬 음악다방 혹은 고수들의 컬렉션 앞에 선 초심자들은 장난감 가게에 나온 어린이처럼 기쁨과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LP에 담긴 음악만이 아니라, 특유의 재킷 디자인도 주목 대상이었다. 재즈 명가 블루노트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음반 디자인을 선보여, 이를 따로 다룬 책이 나올 정도다. 레드 제플린 역시 70년대 특유의 몽환적이고 화려한 싸이키델릭 스타일의 커버 디자인으로 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가수 이름은 몰라도 매장 가득 채워진 LP의 커버 디자인만 보고 황홀해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CD의 시대는 짧았다. 82년 개발돼 9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LP를 대체했지만 곧바로 MP3에 밀려나 ‘10년 천하’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에서는 아이튠, 한국에서는 스트리밍 서비스나 P2P를 통한 불법 다운로드 등 온라인 음악에 밀려, 오프라인 음악시장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한국에 발매되지 않았던 음반일 경우 음악을 듣기 위한 절차는 복잡했다. ‘고운 엽서 위에 가장 깔끔한 글씨로 신청곡을 적어 라디오 방송국에 보낸다 → 공테이프를 준비해 라디오 플레이어에 넣는다 → 마음 좋은 디제이가 나의 음악을 틀어주기를 오매불망 기다린다 → 신청곡이 나오면 즉시 녹음 단추를 누른다 → 까딱 녹음 단추를 늦게 누르거나 눈치 없는 디제이가 노래 전주에 멘트를 넣어버리면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인터넷 세상에서 음악은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쉽게 버릴 수도 있다. 이제 음악은 소장되지 않고 소비될 뿐이다. MP3 재생기에 수백곡의 목록을 지정해놓고 듣다보면 가수도, 제목도 생각나지 않는다. 음악은 귀기울여 들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다만 생활 배경음에 불과하다.



◇포크와 록에서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대중음악의 주류도 바뀌고 있다. 포크와 록에서 힙합과 일렉트로니카로, 젊은이들의 취향은 달라졌다.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임정현씨의 기타 독주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는 사실은 기타 연주가 낯선 풍경이 된 시대를 역으로 증명한다. 사실 낙원상가의 악기상에 가면 임씨 이상의 테크닉을 보여주는 재야의 고수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21세기의 젊은이들은 기타를 모른다. 그래서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기타를 치는 임씨의 모습이 신기하다는 듯 스크랩을 해간 것이다.

요즘 음악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은 기타와 드럼, 베이스 같은 ‘진짜 악기’ 대신, 진짜 악기 소리가 미리 녹음된 기존 음원을 조합한다. ‘진짜 악기로 녹음했다’는 문구가 신기한 듯 홍보에 사용되는 시대다.

힙합, 일렉트로니카가 가치 없는 음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장르에선 여전히 훌륭한 뮤지션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러나 힙합의 밥 딜런, 일렉트로니카의 비틀스를 추천해달라고 부탁 받는다면 선뜻 떠올릴 이름이 있을까. 60, 70년대 음반 판매액을 뛰어넘는 뮤지션은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밥 딜런이나 비틀스처럼 음악계, 문화계를 넘어 한 시대의 정신적 아이콘이 될 만한 음악인이 나올까.



◇그래도 옛날 음악을 듣는다

지난해 내한 공연을 한 미국의 모던 포크 뮤지션 수잔 베가는 ‘포크에 미래가 있나?’는 기자의 우둔한 질문에 현명하게 답했다. “기타와 기타를 칠 손가락이 있는 한 포크는 영원할 것이다.”

세상엔 여전히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어렵게 듣는 사람들이 있다. 더이상 생산되지 않는 LP만을 찾아 눈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 쾌적해보이지도 않는 올드뮤직 카페에 진을 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먼지가 끼어 지직대는 LP 소리, 통기타만이 들려줄 수 있는 맑은 나무 울림을 사랑한다.

옛날 음악에는 옛날 이야기가 담겼다. 60년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그 시대 사람들 이야기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EBS 스페이스 음악감독이자 재즈칼럼니스트인 하종욱씨는 “과거 음악은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과 서민의 삶을 대변했지만, 지금은 영화 등 다른 미디어가 그 기능을 주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음악을 통해서 내가 살지 못했던 시대, 닿을 수 없는 기쁨과 슬픔의 정서를 느낀다”는 게 옛날 음악을 듣는 이유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나’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옛 시절로 돌아간다. 우리도 오늘 옛날 음악을 듣자. 낡은 LP를 꺼내 핑크 플로이드를 듣는 순간, 우리는 그 음악을 미치도록 좋아했던 30년 전 골방으로 이동한다. 옛날 음악은 엄격한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이다. 가을날, 사라진 고향집의 정경이 그리워지듯 지직거리는 LP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음악이 그리워지는 건 혼자만의 감상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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