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실력짱짱 열다섯 천사[장기범교수와 요벨관악단 ‘천상의 화음’]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6.06.05 09:27:14
  • 조회: 612
“동우 마지막 소절만 해봐.” “그게 아니고, 이렇게 띠라딴따 따아.” “다음은 순아.” “어? 두 옥타브는 처음이잖아. 한턱 내야겠네.”

지난 21일 안양시 석수동 안양보육원의 요벨관악단 연습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같은 소절을 반복하는 기술연습곡시간. 화사한 날씨만큼이나 경쾌한 관악기의 선율이 금세 연습실을 채운다.

“푸훗… 으흐흐흐.” “웃기지 좀 마.” “아까 형도 했잖아.”

끊임없이 깔깔대면서 옆 사람과 장난을 치는 아이들의 표정에서 그늘이란 찾아볼 수 없다. 출범 5년째인 요벨관악단은 슬픔의 힘으로 기쁨을 빚어내는 ‘희망관악단’이다.



#슬픔도 기쁨도 악기에 모두 날려요

요벨관악단은 안양보육원 원생인 초등학교 2학년에서 고1까지 15명으로 구성돼 있다. 보육원뿐만 아니라 안양일대에선 이미 유명한 관악단이다. 크리스마스 때나 보육원 졸업생들의 결혼식 축주는 물론 인근 신설학교의 설립기념일이나 어린이날 청와대까지도 초청 받아 연주했다.

“이건 유포니움이고요, 이건 코오넷이에요. 트럼펫보다 작아요. 또 이건….”

5종류의 악기로 이뤄진 5중주 브라스 콰이어. 아이들은 이름도 생소한 악기들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면서 친구들의 악기도 바꿔 불며 금세 따라한다. 창단 당시엔 악보도 볼 줄 몰랐던 아이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사뭇 다르다.

저마다 검정색 연미복을 차려 입고 ‘위풍당당 행진곡’이며 ‘사계’ 등을 멋들어지게 연주하노라면 친구들은 선망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일찍 부모님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거나 생이별한 아이들이지만 음악과 함께하는 그들에게서 슬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3학년때 학교 장기자랑 시간에 트럼펫을 가져가 연주했다는 혜진이(호암초 5)와 바이올린 피아노 팬플룻을 차례로 배우면서 음악 전공의 꿈을 키우는 밴드의 리더 민희(안양서중 3). 두 소녀는 음악을 연주하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한 밝은 아이들로 자랐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이런 변화를 누구보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서울교대 장기범 교수(음악교육·52)다. 6년전 크리스마스때 연주를 하러 안양보육원을 찾았을 때 장교수는 이렇게 오랜 인연을 이어가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날의 공연 이후 장교수에게 보육원 원장이 아이들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해왔다. 원장선생님의 친척이 놓고간 코오넷에 고물이 다된 악기 두어개, 장교수가 가지고 있는 2개의 트럼펫을 들고 5명이 연습을 시작했다. 너무나 부러워하는 다른 원생들을 보며, 보육원이 기업의 지원을 받아 악기들을 차례로 구입했다. 유포니움, 혼, 튜바가 가세하고 트럼펫도 퍼스트, 세컨드로 나뉜 어엿한 관악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눈보라가 몰아치건, 꽃바람이 유혹하건 매주 일요일 장교수는 보육원을 찾는다. 매주 일요일 11시 서울 수유리의 교회에서 찬양대 연습을 마치고 나서 점심도 먹는둥 마는둥 하곤 2시간을 꼬박 달려온다.

“우리 아이들 너무 예쁘죠? 참 잘하죠?”

서로 경쟁적으로 열심히 연습하는 바람에 성장속도가 아주 빠르고, 어린학생들인데도 서로의 소리를 잘 들으며 맞춰간다는 것이 장교수의 자랑이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뿌듯한 변화는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는 것. 자신감도 없고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표정으로 앉아있던 아이들인데, 말도 많아지고 악기를 통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는 모습까지 보면 그렇게 기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

한곡 들려달라는 요청에 악기를 들고 음을 잠깐 고른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진지해졌다. 흥겨운 리듬에 몸까지 흔들며 연달아 2~3곡을 쭈욱 뽑는다.

요즘 혜진이와 순아는 전체 연습 후에 개인 교습을 받고 있다. “아이들이 너무 잘해서 관악협회나 대학주최 콩쿠르에 내보내겠다”며 특별히 장교수가 뽑은 수제자들이다. 장교수가 보육원을 나선 시간은 긴 여름해도 다 넘어간 오후 7시. 5년 전엔 1시간 남짓 가르쳤던 연습시간이 2시간으로, 다시 4시간으로 길어졌다. 처음엔 고학년 10명을 가르치고, 다음은 올해부터 합류한 저학년들, 다음은 클라리넷을 따로 배우기 시작한 2학년생, 마지막이 콩쿠르 대비 개인교습이다.

아이들의 즐거움과 웃음소리와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빚어내는 멜로디. 어떤 연주보다 아름다운 천상의 화음에 찬란한 5월의 녹음도 빛이 바랬다.



》안양보육원의 특별한 ‘특별활동’

월·화·수·토·일요일엔 전문가들이 가르치는 영어회화, 수요일엔 피아노와 바이올린, 월요일엔 서예, 토요일엔 컴퓨터와 미술치료, 일요일엔 태권도, 일주일 2시간의 성악….

안양보육원 원생들은 (유치원 4명, 초등 38명, 중·고생 65명, 대학생 13명) 웬만한 집의 사교육 뺨치는 ‘과외’수업을 받는다. 특별활동에 8개까지 참여하는 학생도 있을 정도.

사지숙 원장(74) 자신이 부모님이 설립한 보육원에서 원생들과 함께 자라며 대학 입학 후(이화여대 교육학과)엔 방학 때마다 친구, 선후배들을 데려와 함께 교사로 활동해 왔다. 보육원 곽현자 생활지도원은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문도 보내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원장선생님의 정성이 아니었으면 이런 다양한 프로그램은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들이 요즘 일일교사 많이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아무것도 못하면 안 되잖아요. 또 남자아이들도 운동이나 장기가 있으면 직장에서도 얼마나 인기가 있겠어요.” 우리 아이들이 남보다 돋보였으면 좋겠다는, 어린시절을 돌이켜 볼 때 행복한 순간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사원장의 말은 엄마의 심정 그대로였다. 매년 스승의 날 이전엔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을 초청해 함께 식사하며 아이들의 장기도 선보인다. 이런 정성임에도 보육원 식구들은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에 모든 공을 돌린다. “여기에 오기엔 너무나도 바쁘고 유명한 분들이 아이들 자존심 꺾지 않고, 아무 티도 내지않고 낮은 마음으로 그렇게 헌신하시는 걸 보면 너무나도 존경스럽습니다. 이런 분들이 있어 세상은 따뜻합니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