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허허 그래, 다 안다[남원시 운봉읍 ‘공안서당’ 3대 이인태옹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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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6.05.09 10:22:01
  • 조회: 443
전북 남원시 운봉읍 공안리. 지리산이 서북 방향으로 흘러 내리면서 바래봉을 떨구어놓았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바래봉 중턱, 울울창창한 송림을 지나 야트막한 산자락에 이르면 “요기가 어드래요?”라는 영화 ‘동막골’ 버전의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갓 쓴 할아버지와 상투 튼 아버지, 댕기머리의 손자가 봄볕을 쬐며 담소를 나누는 ‘공안서당’ 3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다 이러고 살았제…”

‘공안서당’ 1대는 올해 67세의 이인태 할아버지. 출생연도를 말해달라고 했더니 십이지간, 육십갑자를 짚으면서 ‘신사생’이라고만 할 정도로 ‘나이 먹는 데’ 초연하다. 요즘 같은 세상에 상투를 틀고 한복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다.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산과 들판을 가리키며 봄이 되면 온 산천에 푸른 싹이 돋아나듯, 사람의 머리카락도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머리카락를 자르냐는 것. 할아버지에게 머리카락은 곧 생명인 셈이다.

살아오면서 긴 머리 때문에 겪은 애로사항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터. 상투를 틀기 전 ‘댕기머리’로 다닐 때는 ‘아가씨’라는 말을 많이 들어 언제 장가 들어 머리를 올리나 싶었단다. 도포에 갓을 쓰니 이번에는 ‘유학이 나라를 망쳤다’며 시비를 거는 사람들 때문에 애를 먹었고, 예비군 훈련 때만 되면 또 긴 머리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운봉마을에서 태어나 18세에 상경한 할아버지는 서울 마천동의 ‘한복 입은 보일러공’으로 유명했다. 솜씨좋고 부지런해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바쁜 중에도 걸어다니기만 하니까 사람들이 오토바이라도 구입하라고 권유했다. 할아버지는 상투와 한복에 오토바이가 어울리기나 하냐며 거절했다. 지금도 할아버지는 ‘스타일’을 구기지 않기 위해 걸어다니거나, 간혹 자전거를 이용할 뿐이다.



할아버지는 한양대 근처 사근동 살 때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어느 날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길거리에 남루한 사람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는데, 어떤 젊은이가 와서 포돗이(살며시) 업고 가더라고. 물어봤지? 누구냐고. 그랬더니 친구 아버지인데 모셔다 드리려고 한다는 거야. 자식을 잘 키워놓으면 부모가 못났어도 대접을 받는구나 생각했지.”

‘공안서당’ 2대는 청학동 대표 훈장을 지내고 대학과 지자체, 방송과 기업체 등에서 인성 강의를 하고 있는 이학규 훈장(42)이다. 그는 서울의 명문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세상 공부도 좋지만 인륜도덕이 더 중하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한학의 길로 들어섰다. 구례의 명망높은 한학자 안병탁 선생님 밑에서 공부를 시작해 명절을 쇠러 집에도 안 갈 정도도 지독하게 공부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시작했지만 제가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텐데 공부를 해보니 재미있고, 이 좋은 공부를 누군가 하지 않으면 맥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사명감 같은 것도 생겨 끝까지 하게 됐어요.” 그는 또 “자식 중 누구 하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순종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다”고 고백했다.

‘공안서당’ 3대는 ‘훈장님의 자제’임이 자랑스럽고, 커서 ‘마음이 넓은 훈장님이 되고 싶다’는 둘째 아들 승빈이(초등 3학년)다. 예쁘장한 외모에 댕기머리 때문에 여자로 오해받을 때가 많다. 친구들이 머리를 당기며 장난을 치지만 자를 생각이 전혀 없다. 댕기머리는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을 연결하는 ‘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뢰와 범절로 깊어지는 부자지정

속정을 잘 표현하지 않지만 걸어가는 발뒤꿈치만 봐도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이학규 훈장은 “인간관계의 기본은 신의와 예절”이라고 말한다. 근래 들어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신의와 예절이 무너졌기 때문이라면서 어른 앞에서 몸을 낮추고 발뒤꿈치를 들고 다녀본 사람이라면 어떤 유혹,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견디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이 가정생활이나 가족간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것은 참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단다.

그 역시 3대가 함께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없지 않다. 더군다나 특이한 가풍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모양새와 많이 달라 갈등을 겪을 때도 많다고.



“큰 아들 승철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였어요. 두건을 쓰고 수염을 기른 아버지를 그렸는데 친구들이 할아버지냐고 놀렸나 봐요. 그 다음에 아버지를 그렸는데 이번에는 두건과 수염을 빼고 그렸더라고요.” 이훈장은 아이가 아버지의 특이한 모습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선생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다. 다음날 선생님은 승철이 아버지가 왜 그런 모습을 하고 계시고, 훈장님이 어떤 분인지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 주면서 오해를 풀었다. 그날 이후 승철이는 더이상 갓 쓴 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랑은 기본이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존경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존경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한결같은 마음과 행동을 자식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과 멀어 보이고, 외롭고 힘들기까지 한 ‘한학’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부모님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승빈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훈장이 되겠다고 하는 것도 그런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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