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옥천골 ‘밀랍초’부부[번역가 빈도림·이영희씨 그림같은 일상]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6.04.26 08:53:25
  • 조회: 776
빼곡히 솟은 대숲의 어린 잎새들이 나지막한 마을 담장을 간지럽히고 산과 들, 호수는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 자꾸만 이어진다. 제멋을 못감추고 오롯이 솟은 면앙정, 송강정, 식영정…스무여개의 정자가 순한 모습으로 발길을 잡는다. 담양에 들어서면 시인이라도 될 듯 마음이 한자락 한자락 열리며 눈길이 세심해진다.

꼬불꼬불 산을 넘고 호수를 두르는 길을 따라 담양에 들어온 외지인들도 대숲을 가꾸고, 도자기를 빚으며 담양의 자연을 닮아가고 있다. 담양군청을 지나 대덕면사무소로 난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을 따라 20분, 문학리에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어느덧 옥천골. 겨우 다섯채의 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골짜기에 예쁘장한 하얀 집을 짓고 어엿한 터주대감 노릇을 하는 빈도림(54)·이영희(48)씨 부부.



#남편친구 집에 놀러왔다 아예 눌러 앉아

빈도림씨는 독일에서 한국학을 전공한 독일인으로, 이영희씨는 한국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한국인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사람은 양국의 문화를 차근차근 옮기며 부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책을 독일어로 번역할 땐 남편이, 독일책을 한국어로 번역할 땐 아내가 주도적으로 담당하는 등 번역일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이 나누어진다. 하지만 가사일은 요리솜씨 좋고, 테이블 장식도 할 정도로 집꾸미기를 좋아하는 빈도림씨가 도맡아 한다. 현재 살고 있는 집도 설계에서부터 짓기까지 남의 손 조금만 빌리고 빈씨가 수개월에 걸쳐 지었다. 이영희씨는 담양 내려 오기 전까지는 집은 빌리거나, 사거나 하는 거지 직접 지을 수 있는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며 크게 웃었다.

영락없는 작은 시골 마을 아낙의 순한 얼굴로 꿀초를 만들며 두런두런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이영희씨는 ‘문명의 공존’ ‘휴머니즘 동물학’ 등 수십권의 독일서적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가로 특히 까다로운 문학 작품과 고고학, 법률 서적 번역을 많이 했다.

빈도림씨는 작년, 독일인 디르크 휜들링에서 귀화한 담양 빈씨 1대 한국인이다. 빈도림씨의 한국살이는 30여년전부터 시작됐다. 1974년 독일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독일인 1호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입학, 6년간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했다. 1984년 독일에서 한국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해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강단에 서면서 두번째 한국살이를 시작했다. 독일대사관 통역관으로 근무하며 독문학을 전공한 이영희씨와 결혼, 10년 가까운 대사관 근무를 접고 유유자적 담양 골짜기에 집을 지었다.



#‘대나무 꿀초’는 어엿한 특산품 자리매김

“꿀초 아줌마! 하고 누가 부르는데 처음엔 적응이 안됐죠. 나를 부르는가 하고 한참만에야 뒤돌아봤어요. 이젠 너무 예쁘잖아요. ‘꿀초 아줌마’라는 호칭요.”

우연히 담양에 사는 남편 친구집에 놀러왔다 담양살이를 시작한 것처럼 꿀초 아줌마도 참 우연히 됐다. 집 근처 한봉마을에 놀러갔다가 꿀을 내린 밀랍을 보고 어디 쓰느냐고 물었다가, 버린다는 말에 그만,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가져다가 초 만들자’고 했다. 꿀초 만들기는 그렇게 시작된 일이다.

“독일에서 밀랍초를 사 왔어요. 너무 비싸서 아껴 썼거든요. 밀랍을 보자마자 ‘초 만들어 써야지’ 하며 재미로 시작했는데, 이젠 공방도 차리고 어엿한 제조업을 하게 됐네요.”

빈도림씨는 밀랍초에 대한 상식도 풍부했다. 한국에선 신라 때부터 밀랍초를 만들어왔단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제조법의 맥이 끊겨 할 수 없이 독일로 돌아가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다고. 밀랍을 거르는 도구에서부터 초를 만드는 공정까지 신나는 놀이감이라도 발견한 듯 부부는 낮에는 초를 만들고 뉘엿뉘엿 해가 지면 그 초에 불을 붙이는 재미로 하루하루 담양의 풍경처럼 천천히 ‘느리게 느리게’ 시간을 보낸다. 대나무에 밀랍을 부어 만든 대나무 꿀초는 이제 담양의 특산품이 되었다.

4년전 골짜기에 첫 집터를 잡았는데 이젠 4가구가 더 늘어 골짜기는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있다. 큰 딸 빈용화씨(29)는 호주에서 로스쿨을 다니고 있고, 둘째 용수씨(26)와 셋째 경민씨(21)는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다. 최근 원불교 경전 번역을 마친 빈도림씨는 대산재단의 지원을 받아 소설가 현기영씨의 ‘지상의 숟가락’을 번역중이다.

“올망졸망 불을 켜고 밤을 새우는 초를 보고 있으면 요런 것이 어떻게 생겨났나 싶어요. 쏙쏙 어디서 쏟아난 것 같기도 하고, 밀랍이 하나하나 형태를 가진 초가 되면 추수하는 것 같이 마음이 넉넉해져요.”

1층은 거실과 부엌, 남편 서재로 2층은 침실과 아내 서재로 이루어진 작은 나무집. 들꽃들도 꽃잎을 접고 사자돌이와 밍키 그리고 꽃순이까지 토종개 가족들도 제 집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고 골짜기에 석양빛이 감돌면 시골마을을 지키는 노부부처럼 둘은 촛불을 켠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