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사랑의 책 배달부[결손가정 아이 돌보는 김주옥주부]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6.03.27 09:13:04
  • 조회: 306
#2006년 희망의 3월

“에이, 이번엔 떨어졌지만 2학기엔 꼭 회장할 거예요. 전교회장 선거도 나가고.” 5학년으로 올라간 희정이(가명)는 봄햇살처럼 구김살이 없다. 더블에스501과 동방신기를 좋아하고 이수영 언니처럼 노래 잘하는 가수를 꿈꾸는 소녀. 중상위권 성적에 웃음이 유난히 많고 노래도 잘해 친구들에게 인기짱인 희정이에게서 지난 날의 그늘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돌 직후 갈라선 부모님. 두돌이 채 안된 핏덩이는 아빠의 손에 들려 할머니집에 맡겨졌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이후엔 돈을 벌기 위해 아파트 청소를 하시는 할머니를 홀로 기다리던 어린 소녀가 이렇게 밝게 컸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그러니까 재작년 이맘때였다. 김주옥 선생님(43·주부·서울 종암동)이 찾아오신 건. 김선생님을 만난 것은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칙칙한 지하방에 한줄기 밝은 빛이 쏟아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희망도 즐거움도 없던 시절 김선생님은 혼자 집을 지키는 희정이를 찾아왔다. 동화책 한권을 재미있게 읽어주고 이것저것 학교생활도 물어보고 가신 선생님은 ‘사랑의 책 배달부’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가기 싫어 놀이터에서 지칠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들어가곤 했는데, 1주일이나 2주일에 한번 선생님이 오시는 날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은 책도 한권씩 가져와 읽어주셨고, 숙제도 봐 주셨고, 청소하는 법, 요리법도 가르쳐 주셨다. 그중에서도 함께 간식을 만들어 먹을 때가 가장 좋았다. 할머니 힘드신데 왜 설거지도 안했느냐고 막 야단치시거나, 시험이 코앞인데 공부 안 한다고 잔소리하시면 무섭고 귀찮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좋다. 4학년 2학기 때 3차 투표 끝에 학급 부회장이 됐을 때도, 오늘 단원평가에서 수학 90점을 받았을 때도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흐뭇해하실 선생님이었다.

얼마전 초경을 준비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시며 생리대도 사 주시고, 가슴이 나와서 고민할 때 슬며시 예쁜 브래지어 몇개를 내밀던 사람도 김선생님이다. 학교숙제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올 때도 전화로 ‘SOS’를 알리면 늘 친절하게 알려 주신다. 마치 엄마같다. 아니 엄마가 있어도 이렇게 챙겨주실까.



#희정이, 이젠 딸 같아요

버스로 여덟정거장을 타고와 또 다시 마을버스를 갈아타고 희정이네 집으로 향하길 3년째. 현재 ‘사랑의 책 배달부’ 팀장으로 있는 김주옥 팀장에게도 희정이가 딸 같기는 마찬가지. 특히 희정이를 볼 때마다 같은 학년인 둘째딸 하영이가 생각나 남의 일 같지가 않다.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 지역주부들의 모임인 ‘녹색삶을 위한 여성들의 모임’의 소모임 풀빛살림터에서 봉사하던 중 책 배달부를 준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역시 ‘녹색삶…’이 꾸려가고 있던 ‘숙제방’에도 오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직접 찾아가 숙제도 봐주고, 잔소리·칭찬도 하는 등 집에서 엄마가 하는 역할을 나누자는 취지였다. 일단 지역 학교들의 추천을 받은 뒤 일일이 방문해 정말 손길이 필요한 집인지, 지역내 다른 프로그램이 효과적이진 않은지 확인한 후 10여 가정을 뽑았다. 역시 10여명의 봉사자가 1대 1로 방문중이다.

처음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묻는 대답에만 겨우 “예” “아니오”로 대답하던 희정이. 얌전하기만 할 뿐 자기표현이 너무 부족해 안쓰러웠던 희정이는 한학기 정도 지나자 먼저 학교얘기를 시시콜콜 전해오기 시작했다. 기뻤다. 마음을 연 희정이는 딸 하영이와도 좋은 친구가 됐다. 혹시 희정이의 자존심이 상하진 않을까,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지 않을까 몇달을 고민하다가 결정한 집으로의 초대였다. 우려했던 것은 기우였다. 집으로 불러 처음 재운 이후 ‘두 딸’은 박물관 가거나, 마을축제나 여름철 물놀이를 갈 때마다 단짝처럼 붙어다닌다.

하영이 공부를 챙기다 보면 어느새 ‘희정이가 수학만 좀더 잘하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숙제 다 했니? 희정이 너 지금 텔레비전 틀어놓은 건 아니지?” 오늘도 전화선 너머 잔소리가 이어진다.



#다시 봄, “우리의 아이들을 잘 키웁시다”

3월이 되면서 희정이는 선생님과 학습지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영어교과서는 말하기, 듣기 위주라 다른 아이들처럼 따로 배우지 않으면 글자엔 여전히 까막눈이다. 짧은 문장 하나, 단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희정이가 맘에 걸려 김팀장은 하영이가 쓰던 학습지를 가져다가 하영이가 배우던 그대로 가르쳐 주고 숙제 내주고 점검하기 시작했다. 늘 꾸준히 봐 주지 못해 수학이 밀린다고 생각하던 차에 근처에 생긴 방과후 교실과도 연결해 주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추울 때도, 더울 때도 오셔서 우리 희정이 공부도 잘 가르쳐 주시고, 반찬거리·학용품도 나눠주시며 걱정해 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할머니는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지난 겨울방학부터는 희정이가 방과후 교실에서 일주일 내내 공부도 배우고 밥도 무료로 잘 먹고와 너무 든든하다.

“주변에 권하면 ‘내 애한테도 못해 주는데…’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그럴 때 참 아쉽습니다. 그냥 자기 아이한테 하던 대로 조금만 나누면 그 아이에겐 큰 힘이 되는데 너무들 어렵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사실 얼마 전부터 김팀장은 필리핀인 엄마와 2급 장애인인 아빠 사이의 1학년부터 백일이 지난 아이까지 4남매를 맡으며 더욱 바빠졌다. 그래도 희정이와 잡은 손은 희정이가 클 때까지, 아니 커서도 놓지 않을 거라 했다.

내 아이 챙기기에만 급급한 것이 일부 엄마들의 모습이다. 김주옥 선생님은 그 속에서 조금 더 여유를 찾은 엄마다. 어차피 미래에 내 자식과 같이 살게 될 아이들이니 함께 잘 자라도록 같이 품자는 그의 품이 참으로 넉넉해 보였다. 모성의 원래 모습이 그랬던 것처럼.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