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악필, ‘너는 내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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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11.16 09:18:55
  • 조회: 326
아랍어가 아니다. 발로 쓴 것도 아니다. 분명 한국어를, 그것도 내 손으로 썼는데 어떤 글자인지 도통 알아볼 수 없는 건 대체 무슨 조화냐는 말이다. 빨리 흘려 쓴 탓에 글씨가 못난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다. 심혈을 기울여 썼는데도 엉망이라면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악필, ‘너는 내 운명’인 셈인가.

워드 프로세서의 세기가 도래하면서 지독한 악필의 소유자들은 오랜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실제로 대학 리포트부터 신춘문예까지 웬만한 문서 작업은 컴퓨터가 대체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 취직, 심지어 연애까지 인생의 결정적인 고비에는 손글씨로 치러내야 하는 과제가 버티고 있다. 첨단 디지털 기술도 해결해주지 못한 악필의 비애. 그게 ‘비애’란 사실을 알아주는 이 없어 그들은 더 괴롭다.



#악필이라 죄송합니다

대학 입학은 객관식 문제와 결별하고 논술형 답안의 압박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정해진 시험시간, 공부한 내용을 모두 적으려고 속도를 높이다보면 글씨는 삐뚤삐뚤, 꺾이고 휘어지고 난리가 난다. 대학생 이모씨(22·여)는 학점이 잘 나오지 않는 게 악필 탓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궁리 끝에 짜낸 묘안은 답안지 말미에 애절한 메모 한줄을 남기는 것이다. “교수님~ 글씨 말고 내용을 봐주세요! 악필이라 죄송합니다.”

물론 교수 중에도 악필은 있다. 교수 김모씨(34)는 강단에 선 이래로 분필을 잡아본 적이 없다. 학생들에게 초등학생 같은 글씨체를 보이는 게 창피해 OHP나 파워포인트를 사용해 강의하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정전이 돼 컴퓨터 전원이 나가던 날은 정말 청천벽력 같았다. 그는 ‘명예’를 택하기로 했다. 교과서 속 그림을 칠판에 정교하게 그려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한 것. 글씨를 쓰느니 차라리 그림 그리는 편이 나았다.

악필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도 지장을 준다. 행정병으로 군에 입대했던 호텔리어 곽용덕씨(34). 그날의 날씨와 훈련계획 등을 안내판에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최대한 깨끗하게 쓰려고 장장 30분에 걸쳐 정성껏 적어 내려갔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대장의 불벼락. “이거 요새 누가 쓰냐? 이 자식 다음부터 쓰지 말라고 해.” 그의 악필 콤플렉스는 사회에 나온 지금도 여전하다. 사무실 동료에게 걸려온 전화 메모도 서너줄이 넘어가면 반드시 워드로 쳐서 출력할 정도다.

악필로 고민하기는 외국도 마찬가지다. 지난 5월 미국 국가필기위원회(NCW)는 공무원의 악필이 공문서를 해독하는 데 혼란을 불러오고 행정처리를 지연시켜 연간 2억2천만달러의 손실을 발생시킨다고 발표한 바 있다.



#석달만 눈 딱 감고

못 쓴 글씨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받침이 첫소리 자음보다 눈에 띄게 크거나 작다. 글자 획이 곧지 않고 힘없이 휘어지는 것도 전형적인 악필. 한글자씩 떼어서 보면 악필이 아니더라도 문장을 이루는 각 글자의 크기와 높이가 고르지 않아 들쭉날쭉하다면 역시 흉하게 보인다.

악필을 고칠 수 있을까? 어느 인터넷 사이트의 네티즌 모임인 ‘악필동맹’ 게시판엔 “한때 노력해봤지만 포기했다”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교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한글씨검정교육회의 이상남 검정부장은 “일단 이론을 익힌 뒤 2~3개월 정도 쓰기 연습을 하면 글씨체를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석봉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는 법. 필기는 피아노 연습과 같아서 많이 써볼수록 잘 쓰고 지레 포기하면 고치기 더 어렵다.

실제로 자세나 펜 잡는 법 등 조건이 바뀌면 글씨체가 달라진다고 한다. 필적 감정 전문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한 문서감정관은 “동일 인물이 작성해도 기재 환경에 따라 글씨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며 “작성자가 의도적으로 변화를 주면 얼마든지 변형된 필법을 구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악필을 교정하려면 되도록 어린 나이에 시작하는 게 효과적이다. 유년기에 악필을 교정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됐다면 결연한 의지로 난관을 극복하는 수밖에. 일단 바른 자세로 앉는 습관을 기르도록 한다. 펜 쥐는 법도 점검해보자. 손의 힘을 빼고 밑에서 3~4㎝ 되는 곳을 가운데 손가락의 첫번째 마디 위에 걸친 뒤 엄지와 검지로 잡는다. 종이면과 펜의 각도는 45도쯤이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글씨는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내 글씨가 어디가 어때서’라는 마음가짐이라면 ‘고운 심성에서 고운 글씨가 나온다’는 주위의 모함(?)도 이겨낼 수 있을 터. 혼자 걸어가는 길이 외로울 땐 대한글씨검정교육회(www.gulssi.or.kr)의 문을 두드려보자. 무료로 악필 교정을 상담해준다.



▶깔끔한 ‘손글씨 광고문’이 뜬다

비록 펜글씨 학원은 자취를 감춰가고 있지만 ‘예쁜 글씨 POP’ 학원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POP(Point of Purchase·피오피)는 구매시점 광고를 뜻하는 말. ‘3만원 이상 구매시 사은품’ ‘수험생 합격기원 이벤트’처럼 대형 할인점이나 백화점 판매대 옆에 붙어있는 광고 포스터를 생각하면 쉽다.

이런 포스터는 한눈에 쏙 들어올 만큼 깔끔하지만 컴퓨터로 출력한 게 아니라 사람이 직접 손으로 써서 만든 것이다. 인쇄하는 광고물에 비해 다양한 글씨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게 손글씨의 장점. 물감의 색깔과 글씨체를 적절히 선택하면 음식 메뉴판은 먹음직스럽게, 행사 안내는 발랄한 느낌이 들도록 꾸밀 수 있다. 그때그때 변하는 매장 상황에 맞춰 재치있게 광고 문구를 바꿀 수 있다는 점도 손글씨 광고문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다. 손글씨 POP 만들기는 부업으로도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소자본 창업도 가능해 주부나 학생들이 많이 배운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요가 늘면서 백화점 문화센터도 관련 강좌를 운영하고 있다. ‘헬로아트 예쁜글씨 POP학원’의 오연화 원장은 “악필을 고치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며 “글씨 쓰는 자세까지 교정하려면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에서 배우는 게 낫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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