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관객의 슬픈 고백 무대위서 보듬다[극단 ‘해’, 이주노동자 찾아 치유연극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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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경향신문 자료제공(www.khan.co.kr)
  • 05.10.21 0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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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중에 이야기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 있나요?”

극단 ‘해’의 노지향 대표가 물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별볼일 없는 인생 같아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세상에 없다.

지난 일요일, 경기 시흥시 작은자리복지관 강당에 40여명의 이주노동자가 모였다.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먼 타국에서 한없이 고단하고 초라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이들이지만 오늘 하루 연극의 주인공이 될 자격은 누구에게나 충분했다.



#대본없이 즉석에서 연극으로 옮겨

잠시 웅성거리기만 하던 객석에서 한명이 불쑥 일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쥔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가슴에 응어리져 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향에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어요. 결혼할 돈이 없어서 3년 전 한국에 돈 벌러 왔어요. 열심히 일했어요. 정말 사랑했거든요. 한달 전에 전화했더니 며칠전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고 미안하대요. 기다려 준다고 해놓고선….” 방글라데시에서 온 로니(24)의 목소리는 가늘게 흔들렸다.

로니의 슬픈 사랑 이야기는 극단 ‘해’ 단원들에 의해 즉석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7년전 학교에서 모니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떨림, 돈이 없단 이유로 결혼을 반대한 부모님, 돈 벌러 떠나올 때의 가슴아픈 이별, 한국에서의 모진 생활, 전화 한통으로 산산조각난 사랑…. 의자에서 조용히 연극을, 아니 아련한 기억의 한토막을 지켜보던 로니는 공연이 끝나자 “정말 감사합니다”란 말을 남기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외롭게 홀로 꽁꽁 싸매뒀던 이주노동자들의 상처는 봇물터지듯 흘러나왔다. 방글라데시인 뚜힌(30)은 출입국관리소 단속에서 자신만이 살아남은 사연을 털어놓았다.

갑자기 들이닥친 단속반. 친구와 함께 창문으로 뛰어내렸지만, 산속으로 도망간 친구는 잡히고 말았다. 친구와 반대방향으로 정신없이 달리던 뚜힌은 근처 다른 공장으로 뛰어들어 김칫독 안에 숨었다. 뚜힌은 다행히 들키지 않았지만, 그 공장에서 일하던 스리랑카인들이 그를 쫓아온 단속반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미안해, 친구야. 미안해, 스리랑카 친구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자신을 대신해 힘껏 소리쳐주는 배우들을 보면서 뚜힌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필리핀·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남의 얘기가 아닌 모두 자신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리라.



#고단한 삶 들어주는 자체가 큰 위로

“추상적인 기억을 머릿속에 정리하지 않은 채 남겨놓는 것과, 연극을 통해서라도 눈 앞에서 실제로 보는 건 분명 달라요. 카타르시스를 통해 슬픔을 흘려버리거나, 혹은 객관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되는 거죠.” 김혜진 단원(26)이 설명했다.

이를 ‘플레이백 시어터’라 부른다. 관객의 이야기를 토대로, 테이프를 되감아 시간을 돌리듯 즉석에서 연극을 만들어 보여주는 즉흥공연이다. 1975년 뉴욕에서 시작된 플레이백 시어터는 이미 세계적으로 그 교육적, 치료적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

“당장 한번의 연극으로 저들을 어떻게 치유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단지 기쁜 이야기든, 슬픈 이야기든 정성껏 들어주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지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펼친 극단 ‘해’의 공연은 이번이 벌써 8번째다.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벌금을 물기 때문에 석달밖에 안된 핏덩이를 출국시킬 수밖에 없었던 필리핀 여성의 애절한 사연, 종교박해로 망명을 떠나 어느덧 ○○○째 부모님 얼굴조차 보지 못한 모슬렘인 미얀마인 이야기….

한 사연으로 꾸며지는 연극은 길어야 고작 20여분. 조촐한 무대가 정리되고, 즉흥연극에 울고 웃던 이주노동자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연극은 끝났어도,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먼 훗날, 해피엔딩으로 끝날 그들의 ‘그 후 이야기’가 또다른 플레이백 시어터로 꾸며질 그날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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