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마을회관 스피커의 ‘진화’[평택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마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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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10.19 09:08:42
  • 조회: 600
“여기는 솔부엉이 라디오방송입니다. 오늘은 ‘한가위 주민노래자랑’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좀 부끄럽지만 제가 부른 ‘섬마을 선생님’을 들으셨습니다. 즐거운 일만 가득해도 모자랄 텐데 이번 한가위에는 마음 상하는 일이 좀 있었죠? 연휴 전날 대양학원 이사회는 재단 부지를 국방부에 매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국방부에서 대추초등학교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고 합니다. 우리 마을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다들 관심을 가져주시고 우리 마을을 지킬 수 있도록 단합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을회관 스피커를 타고 울려퍼지는 동네방송. 아나운서는 마을 부녀회장 오정순씨(56·작은 사진)다. 이제 방송 경력은 두달밖에 안 되지만 그는 “마을을 위한 일이라면…” 하고 기꺼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대본은 지난 번보다 고칠 게 적은 것 같네요. 바로 녹음 들어갈까요?” 오늘도 마이크를 잡은 오씨. 이젠 제법 익숙해졌다.

모두들 숨죽인 가운데 시작된 라디오 녹음. 오씨가 첫 문장을 읽기 무섭게 창 밖에서 굉음이 들려온다. 미군 기지 ‘캠프 험프리스’에서 전투기가 또 한대 이륙한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NG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기대와 달리 소음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헬기 뜰 때보다 더 요란하네요.” 기다리는 동안의 침묵이 어색했는지 녹음 기기를 들고 있던 PD 반지씨(25)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곳. 여기는 미군기지 확장 반대운동이 한창인 경기 평택시 팽성읍이다.



#마을 스피커의 변신

팽성읍 대추리·도두리 방송 ‘솔부엉이 라디오(http://peacenomad.icomn.net)’가 첫 선을 보인 것은 지난 8월이다. 영상이 없으니 라디오가 맞긴 맞는데 엄밀히 말해 ‘전파 탔다’고 하긴 어렵다. 마을회관 스피커로 방송한 거니까. 물론 그전에도 스피커 방송은 있었다. 경조사 소식부터 농약 받아가시라는 안내까지, 주민들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지는 이장님 목소리를 듣고 마을 대소사를 챙겼다.

마을 소식을 전한다는 점은 솔부엉이 방송도 비슷하다. 그렇다면 결정적 차이는? 솔부엉이 방송은 ‘이장님 1인 제작 시스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을에 들어와 있는 평화운동가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간다. 방송 내용도 국방부에 마을 땅이 얼마나 팔렸는지 등 기지이전 소식이 주를 이룬다.

“미군기지를 팽성읍으로 이전한다는 정부 정책 때문에 이곳은 전쟁터나 다름 없어요. 관련 소식을 전하기 좋은 매체가 무엇일까 궁리하다보니 대추리 마을회관에 있는 스피커가 떠올랐죠. 스피커 방송은 할아버지, 할머니도 쉽게 들을 수 있으니까요.”(반지)

대추리 이장님은 흔쾌하게 스피커를 내주셨다. 동네 방송이니 녹음 설비가 좋을 리 없다. 작은 마이크가 달린 캠코더 한개가 전부다. 아, 소리가 튀지 않도록 마이크 앞에 대는 ‘특수제작’ 소리 거름망도 있다. 철사로 고리를 만든 뒤 보기 좋게 스타킹을 씌우고 싶었지만 스타킹이 없어 양파망을 사용했다. 모양은 다소 우스워도 까짓 거, 녹음만 잘 되면 그만이다.



#앵커가 된 부녀회장

제작과 대본은 평화운동가인 반지씨와 여름씨(29) 두사람이 맡았고 진행은 주민들이 한다. 평생 자식 키우고 농사 짓는 일밖에 몰랐던 오씨도 솔부엉이 방송 덕분에 졸지에 아나운서가 됐다. 이 나이에 방송이라니. 쑥스럽긴 하지만 마을의 존폐가 달린 기지이전 소식을 전한다는데 뒷짐지고 있을 수야 있나. 이제는 오씨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날 녹음하는 3회분 방송 내용은 두가지. 대학생들이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평화농활을 잘 마치고 돌아갔다는 것과 평택시청 앞에서 미군기지 반대 릴레이 1인 시위가 시작될 예정이라는 뉴스다.

“어디 보자…. ‘도두리 어느 집에 불이 났을 때 농활하러 온 대학생들이 뒷정리를 도와줬습니다.’ 음 이건 아니야. 뒷정리만 한 게 아니고 불도 같이 껐어. 불도 껐다고 고쳐야 되어요.” 이런, 오보날 뻔했다. 여름씨가 오씨네 집 마루에 배 깔고 엎드린 채 후닥닥 대본을 수정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정작 오씨가 살고 있는 도두리에선 스피커 방송을 들을 수 없다. 도두리 이장님이 스피커 사용을 ‘윤허’하지 않으셨다고. 전임 이장님이 거나하게 취해 스피커를 켜고 노래를 부른 사건 이후로 운영 방침이 한결 엄격해진 탓이다.



#솔부엉이 방송, 과연 언제까지

팽성읍은 당초 갯벌이었다. 사람들은 맨손으로 땅을 일궈 비옥한 농토로 만들었다. 자식들에게 가난과 못 배운 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보릿 고개에도 곡식을 걷어 대추초등학교를 세웠다. 오씨의 세 자녀도, 오십을 바라보는 대추리 이장님도 이 학교 졸업생이다. 학교 자체가 그대로 마을의 역사인 셈이다.

그런 학교를 교육청이 국방부에 팔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은 믿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가 모래를 퍼날라 만든 운동장, 내가 공부하던 교실, 우리 딸이 가꾼 화단이 이제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라니. 기가 막혔다.

국방부의 지난 9월 발표에 따르면 평택의 기지이전 대상지역 3백49만평 중 66%가 국가에 매수됐다. 주민들이 내놓지 않은 땅은 중앙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을 거쳐 강제로 수용할 방침이다. 예상되는 재결 시기는 오는 11월 말. 강제수용으로 결론이 나면 국방부는 내년 초부터 마을 철거에 들어가게 된다. 마을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떠나야 한다.

“가긴 어딜가요. 미국놈이랑 같이 살면 되지. 국가에 더 이상 바라는 것도 없어. 요대로 살게 놔두라는 거여.” 35년 전 도두리로 시집 와 마을을 떠나본 적이 없는 오씨. 아이 하나는 들쳐업고 둘은 길바닥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논일을 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이제 여생을 마음 편히 보낼 일만 남았는데 정부는 다른 곳으로 떠나라고 등을 떠민다.

“오는 길에 들녘 보셨어요? 이렇게 좋은 땅 본 적 있어요? 논이 기름져서 밥맛도 끝내줘. 내년 봄에도 모 심고 농사지어야 할 텐데….”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사람들. 내일이 막막한 그들의 삶을 묶어주는 것은 마을회관의 꼭대기에 붙어 있는 빛바랜 스피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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