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억척주부로 … 영어교사로 … ‘산골마을 보배’ [필리핀서 시집 온 담양의 며느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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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10.11 09:01:57
  • 조회: 393


“웰 컴 투 만덕골.” “굿 애프터눈 마리셀.” 5일 오후 전남 담양군 대덕면 만덕산 산기슭에 자리한 만덕초등학교 정문 앞. 먼지를 휘날리며 신작로 길을 달려온 버스에서 마리셀 엠 비카(33·담양군 무정면 오룡리)가 내리자 학생 20여명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 경쟁하듯 ‘영어 한 마디’씩을 쏟아냈다. 이내 학생들은 그의 손을 이끌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가면서 그동안 익힌 노래 ‘에델 바이스’를 합창했다. 적막감만 감돌던 산골 학교가 매일 오후 생기가 넘쳐나는 이유다.



전남 담양으로 시집 와 벽지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필리핀 출신 여성들이 담양군 문화회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마리셀 엠 비타, 파블로, 할린, 아멜리아, 쉘린 프렌스, 엘리자베스, 루실라, 레니, 마리셀 토레도씨.

마리셀은 작년 6월부터 이 학교를 포함, 담양군 내 오지 초등학교 3곳을 돌며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산마루를 서너개씩 넘고, 10여㎞나 되는 여정이지만,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김없이 ‘고향의 막내 동생같은’ 그들을 만나러 간다.



담양군 내에서 마르셀처럼 초등학교를 찾아 영어를 가르치는 필리핀 여성은 모두 10명.

엘리자베스(40·금성면 대곡리), 요란다(36·담양읍 천변리), 루실라(36·대덕면 금산리), 아멜리아(34·담양읍 백동리), 레니(29·수북면 개동리), 파블로(29·담양읍 남산리), 마르셀 토레도(28·담양읍 양각리), 쉘린 프렌스(27·"), 할린(26·담양읍 백동리) 등이 주인공들이다. 한국에 시집온 지 11년된 엘리자베스가 맏언니, 7년된 할린이 막내격이다. 모두 대학에서 경영학·문학·수학 등을 전공한 재원들이다.

이들이 ‘농촌학교 영어교사’로 나선 데는 한국인 이웃의 따뜻한 보살핌에 대한 보은의 뜻이 듬뿍 담겨 있다. 담양군에서도 고학력자인 이들을 어떻게든 지역발전에 활용해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수년간 한글 교육을 집중적으로 해 온 것이 결실을 보게 됐다.

이들은 대학 교수가 평가위원이 돼 치른 우리말 읽기·쓰기·듣기·말하기 평가와 수업지도 능력 테스트에서도 합격, ‘군수 인증서’를 받고 교단에 섰다.

요란다는 “담양으로 시집 온 ‘필리핀 출신 며느리’ 42명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성공적인 삶을 꾸리고 있는 데 대해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담양 남초등학교 이남희 교장은 “학원 한 번 갈 수 없는 딱한 처지의 산골 아이들을 돕는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정말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아! 옛날이여이

들은 물 설고 낯선 이국땅 한국에 안착하기까지 보통 5~6년이 걸렸다고 입을 모은다. 이국인 며느리들이면 누구나 음식·언어·의식 등 문화의 차이를 좁히느라 늘 가족과 신경전을 펴는 기간이다. 게다가 대부분 집에서 비닐하우스 농사나 벼농사를 짓고 있어 들녘에 나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여서 고통은 2배가 된다.

그런 고통의 세월을 잘 넘긴 덕에 필리핀 대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들도 이젠 뙤약볕 아래서 몸 사리지 않고, 땀 흘리는 억척 주부로 변해 있다. 엘리자베스는 “누구나 ‘김치냄새’를 이겨내는 것이 가장 넘기 힘든 통과의례가 된다”면서 “하지만 이젠 모두가 시어머니만큼 김치를 잘 담글 수 있다”고 자랑했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이 신혼시절 언어장벽 때문에 겪은, 웃지 못할 일화 하나. 어느 날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던 중 ‘이제 그만하자’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만 ‘Now finish’라고 말한 것이 ‘이혼사태’로까지 비화했다는 것.



부인의 말을 ‘이제 (결혼관계를) 끝내자’는 뜻으로 알아들은 남편이 “당장 짐을 싸서 돌아가라”고 되받으면서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주변의 ‘필리핀 주부들’이 득달처럼 달려가 오해를 풀지 않았다면 자칫 첫번째 ‘이혼 사례’가 될 뻔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필리핀 주부들에게 ‘finish(끝내다)’란 말은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아야 할 단어’가 됐다.



#“우리도 단군의 딸”

이들은 아이 울음 그친 농촌에 다시 갓난 아이들의 울음을 되찾게 했다. 아멜리아는 아들만 셋을 낳았다. 막내가 며칠 전 100일을 지냈지만, 내년쯤 딸 하나를 더 가질 계획이다. 딸 둘을 낳은 마리셀 엠 비카도 아들 2명을 얻을 때까지 계속 낳겠다고 귀띔했다. 모두들 아들딸 3~5명은 있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모유 먹이는 것은 당연하고, 그 흔한 제왕절개 수술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한다. 마을 어른들의 눈에는 하나같이 ‘예쁜 짓’만 하는 ‘귀하신 몸들’이다. 필리핀이 일본지배를 받아선지 ‘반일감정’도 한국인 못지 않다. 파블로는 “일본이 필리핀에서 저지른 만행은 한국에서보다 더 잔인했던 것으로 기록에 드러난다”면서 “아시아에서 일본의 고약한 침략근성을 고쳐줄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주특기인 유창한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농촌을 살리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학창시절 반장을 도맡아 했다는 레니는 “담양 땅에서 나는 ‘청정 농산물’을 외국에 내다 파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을 좀 더 깊이있게 공부한 후 주민대표(의원)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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