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포성 멎은 매향리 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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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9.16 10:47:00
  • 조회: 332
매향리는 고요했다. 물빠진 갯벌을 휘젓는 바닷바람소리만 ‘휫휫’ 들릴 뿐. 육지로부터 2㎞나 펼쳐진 갯벌은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고 두건을 쓴 아낙네 몇이 갯벌을 헤집고 있을 뿐이었다. 팔자좋은 강태공이 바다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정녕 이 마을에도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 것일까.

광복절을 사흘 앞둔 지난 8월 12일. 경기도 화성군의 작은 어촌인 ‘매향리’엔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매향리 심장부에 떡하니 앉아 있던 미군기지가 마침내 철수하게 된 것이다. 폭격을 의미하는 ‘황색 깃발’. 매향리 사람들에겐 진절머리나는 지긋지긋한 깃발. 1년 내내 수시로 휘날리던 그 깃발은 이제 사라졌다. 대신 ‘매향리 평화마을’이라고 적힌 녹색 깃발이 휘날렸다. 1955년에 미군기지가 자리잡았으니 54년만에 진정한 ‘광복’이 찾아온 것이다.

그 후 한달만에 찾은 매향리.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모두가 평온하게 일상으로 돌아간 듯 했다. 외견상으론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미군이 떠났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나요.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졌는데… 포성이 멎었으니 마을이 좀 조용해지긴 했네요. 하지만 얼마전 환경단체에서 이곳 토양이 중금속에 오염됐다고 떠드는 통에 장사는 예전보다 못해요.”

포구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김연희씨(39)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했다. 갯벌을 따라 걷다보니 곳곳에 박혀있는 커다란 포탄들이 눈에 띈다. 하나 무게만도 228㎏. 수많은 포탄들이 갯벌의 가슴에 박힌 못처럼 그대로 꽂혀 있었다.

멀리 갯벌 위에 민둥섬, 아니 민둥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농섬이다. 수십년간 미군 폭격기의 표적이 되어 찢기고 깎였다. 농(濃)섬은 말 그대로 수풀이 우거졌던 섬이었다. 물이 빠지면 2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곳. 주민 추영배씨(61)는 농섬의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수풀이 무척이나 우거졌지요. 아름드리 소나무가 정취를 더하고요. 봄이면 나물을 캐러 놀러가곤 했어요. 새알을 훔치러 나무 위에 올라가기도 했고…. 해질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답게 걸리던지…”

농섬보다 앞서 폭격의 대상이 된, 거북이 귀 모양의 ‘귀비섬’은 현재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 아름다웠던 농섬도 세파에 머리가 뭉텅뭉텅 빠져버린 노파처럼 숲이 패여 민둥산이 되고 말았다. 처녀 앞가슴처럼 봉긋했던 봉우리는 폭격으로 깎여 밋밋해졌고 섬 크기도 삼분의 일로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이 어디랴. 미군은 지난 달 철수를 시작하면서 농섬의 포탄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농섬 자체를 아예 폭파시키려고 했다. 그야말로 풍전등화. 주민들의 적극적인 반대시위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과거를 지우려는 자와 기억하려는 자의 치열한 다툼이었다.

“아마 1960년대 초였지. 갯벌에 빠진 미군 헬리콥터를 띄우기 위해 전 주민이 동원됐어. 그런데 한명이 꼬리 프로펠러에 가슴을 맞고 크게 다쳤어. 하지만 어디 찍소리라도 할 수 있나. 치료비 한푼 못받고 평생 ○○○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

김영철씨(50)의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 별 것도 아닌 듯 말하는 이런 담담함에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하긴 이 정도는 사건도 아니었다. 폭격 소음으로 마을 주민들은 단체로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1960년대 후 30여명이 자살을 하고 일흔이 넘은 노인들끼리 장기를 두다가 식칼로 찌르고, 어린 중학생이 동네 친구를 버스에서 찔러죽이고…. 1980년대 전까지 이런 일이 왜 빈번한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보상금 몇푼으로 죽어간 주민들의 넋이 위로가 될까.

밀물이 되니 산은 어느새 섬이 됐다. 철조망 사이로 바라본 농섬이 불타오른다. 이제는 파편이 튀는 폭격이 아니라 섬 전체를 감싸는 저녁노을로…더이상 찢길 곳조차 없는 작은 섬도 이렇게 아름다우니.
농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우리 현대사의 박물관이고 분단의 희생자다. 과거를 기록하고 현재를 증언하기 위해 농섬은 보존돼야 한다. 농섬에 박힌 포탄은 매향리의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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