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공부도 사랑도 언제나 현재형 [손자, 손녀 둔 늦깎이 여고생 용출아줌마]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8.25 09:05:33
  • 조회: 451
“용출 아줌마 어디 가요?” “왜 불러, 나 바빠요.”

아줌마가 요즘 바람이 났나. 매일 점심 때가 좀 지나면 예쁘게 화장하고 핸드백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 나이에 새로 직장이라도 생겼나. 1년 전부터 행동이 수상쩍다. 어떤 날은 혼자서 무언가 중얼중얼 외우기도 한다. 작은 단어장을 손에 쥐고선. 혼자 까르르 웃을 때도 많다. 꼭 사춘기 여고생 마냥. 환갑이 코앞인데 손자, 손녀를 둔 여고생이 가능한 걸까. 용출 아줌마에겐 ‘공부도 사랑도’ 언제나 현재형이다.



#담임이 인정한 ‘억순이’

오후 2시10분. 서울 마포구 염리동의 일성여자중고등학교 3학년3반 오후반 교실. 수업 시작 전 담임 교사가 들어서자 여고생 30여명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난다. 20대 후반부터 65세 큰 언니까지 다양하다. 피부가 검고 눈이 부리부리한 지지성 담임교사(31)는 총각으로 ‘인기짱’이다. 지난 5월 다녀온 졸업여행에서 같은 반 민자가 지선생님을 꽉 껴안은 바람에 담임을 두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용출 아줌마’ 박용출씨(58)도 담임 얼굴만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딸이 있으면 사윗감으로 그만인데. 대학진학으로 고민할 때 자상하게 상담해준 선생님. 용출 아줌마의 목표는 장안대 사회복지학과이다. 오는 9월 수시모집에 지원할 예정이다. 내년 꽃피는 봄이면 당당히 여대생이 될 거다.

일성여중고는 2년제 학력인정 주부학교다. 방학을 쪼개 6학기제로 운영한다. 가족 생계를 위해, 오빠와 동생들 뒷바라지에 때를 놓친 늦깎이 주부들이 전국에서 모여 공부한다. 용출 아줌마도 다르지 않다. 부모 몰래 동네 언니가 쓰던 헌 책가방과 하얀 교복을 얻어놓았지만 가난으로 여고생 되는 꿈은 일찌감치 접어야 했다.

“그땐 아버지가 무서워 감히 ‘보내달라’고 떼쓰지도 못했어요. 결혼하고 사는 데 바빠 가슴 속으로만 멍울이 졌죠. 입학식 때 얼마나 가슴 떨리던지 그 심정 모르실 거예요.”

지난 30년간 수원역 앞에서 식당을 했다.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돈이 있어야 자식들 학교에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억척스럽게 살았다. 머리가 벽에 닿기만 하면 바로 잠드는 졸음보. 그러나 수업시간엔 한번도 졸아 본 적이 없다. 결석·지각은 상상도 못한다. 여고생 생활이 꿀맛 같다. 담임 교사가 인정한 ‘모범생 억척순이’다. 자원봉사도 전교에서 1등이다. 등·하교 시간만 4시간이 걸리고 살림하며 힘들 텐데 아무도 못말린다.

가장 어려운 과목은 영어와 수학. 식당에서는 손님이 한꺼번에 들이닥쳐도 주문이랑 돈 계산을 척척해낸 ‘셈 박사’였는데 수학은 난공불락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영어다. 잘 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마음 따뜻한 식당 아줌마

TV에서 골퍼 꿈을 키우는 ‘할렐루야 보육원 골프단’ 아이들을 봤다. 그때부터 매달 생활비를 아껴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 벌써 5년째다. 경기도에 훈련을 오면 수원 집으로 초대해 밥을 해주고 여관비를 보탠다. 영어는 골프 꿈나무들이 해외 원정경기나 훈련을 나갈 적에 따라다니며 밥 해주고 보살피고 싶어 열심이다.

용출 아줌마는 부모 없는 아이들과 인연이 많다. 그중 경기 송추의 한국보육원에 살았던 3남매가 가장 애틋하다. 3남매와 알게 된 것은 13년 전이다. 임시아동보호소에서 만난 아이들이 송추에 있는 한국보육원으로 옮겨진 것을 알고 1주일에 한번씩 한결같이 찾았다. 비록 친엄마는 아니지만 자신들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방학 때면 3남매는 수원 아줌마 집에서 지냈다.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자주 여행을 갔다.

“한번은 제주도 여행을 가는데 남편이 말렸어요. 제 자식은 놔두고 보육원 아이들에게 더 신경쓰는 것이 못마땅했던 거죠. 그래도 아이들과 약속을 했으니 다녀왔죠. 그때 잠깐 남편과 각 방을 썼지만요. 하하.”

예쁘기도 했지만 속 썩는 일도 많았다. 아이들이 차례로 사고치는 바람에 보육원과 학교를 오가며 사고수습 하기 바빴다. 둘째는 고등학교 때 오토바이 음주사고로 6개월간 식물인간처럼 병원에서 지냈다. 그때도 병실을 지켰다. 한번은 막내가 큰 사고를 내는 바람에 보육원에서 쫓겨나게 됐다. 밤새도록 원장에게 매달려 통 사정을 했다. 원장은 “부처님도 되는 나무에 물을 주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만 고생하세요”라며 오히려 걱정했다.

“‘될 나무는 물을 주지 않아도 잘 클 테니 저는 이 아이들에게 물을 주겠어요.’ 그렇게 말했죠. 다행히 보육원에서 다시 받아줬어요. 그 이후에도 학교와 직장을 쫓아다니면서 매달리며 사정 할 때가 많았죠. 한창 방황할 시기였으니 아이들이 힘들었나봐요. 이젠 어른이 돼서 제 갈길 다 찾았죠. 직장에 잘 다니고 있어요.”

식당은 2년 전 그만뒀다.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고 나이탓인지 관절염과 당뇨가 생겨 힘에 부쳤다. 식당이 수원역 앞에 있어 지방에서 무작정 올라온 아이들과 쉽게 인연이 닿았다. 울산에서 온 한 남자 아이는 2년간 데리고 있으며 돌봤다. 취직하겠다며 식당을 나간 후 가끔씩 캥거루 지갑, 우산, 꿀병이 든 소포가 왔다. 직장을 자주 옮겨다닌다는 표시였으니 안타까웠다.

몇해전 세상을 뜨고 말았다. 또 15살 난 남자 아이는 알코올 중독이 심했다. 알코올 클리닉을 데리고 다니며 애썼다. 3개월간 요양원에 보내 술과의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어엿한 30대 가장으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명절이면 안부전화를 받는다. 내 자식은 아니지만 어렸을 때 만나 돌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큰 행복이다.

“살수록 인생이 참 재미난 거 같아요. 공부도 재미있고요. 처음 시작할 때는 다 늦게 공부해서 뭐할까 망설이기도 했는데…. 사회복지학 전문가가 돼서 어려운 애들과 노인들을 좀더 잘 도울 일을 찾아볼래요.”

공부도 사랑도 열심인 용출 아줌마.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요즘 기말고사로 밤을 지샌다. 마음씨 따뜻한 용출 아줌마의 환한 미소가 다가온 가을 하늘 뭉게구름처럼 푸근하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꼭꿈을이루 05.09.01 18:00:47
    아줌마는 이미 사회복지사지만 외형적인 사회복지사의 꿈도 꼭 이루세요. 아줌마가 꿈을 이루는 것은 아줌마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불우한 아이들에게도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