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야기] “사랑담은 도시락 마음까지 채워요”[삼척 ‘사랑의 도시락 아저씨’ 최해중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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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6.24 09:14:51
  • 조회: 436
소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가정형편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빨리 포기한 탓에 오른쪽 다리를 평생 절뚝거리게 됐다. 그러나 이웃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눈빛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원망과 방황으로 가슴이 시커멓게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 몰고 다니는 노란 택시처럼 멋지게 산다.



#삼척 달리는 멋쟁이

강원 삼척 시내를 누비는 택시기사 최해중씨(55). 언제나 말쑥한 양복차림에 세련된 타이를 맨다. 몸도 불편한데 옷까지 후줄근하면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1년 전부터 택시를 몰고 있다. 삼척 전화국에서 4년간 계약직으로 전보 배달 일을 하다가 일자리를 잃은 후다.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매주 금요일. 아침 일찍 남양동에 있는 시립 자활후견센터를 찾는다. 돈가스·콩조림·잔멸치·김치 등 맛있는 반찬이 골고루 담긴 따끈따끈한 도시락 30여개를 받는다. 점심을 굶는 어린 아이들과 독거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배달할 ‘사랑의 도시락’. 2년 전부터 도시락 배달 봉사를 한다.

삼척 시내와 조금 외진 근덕면을 돈다. 오르막, 골목, 뒷길을 찾아다니며 눈썹 휘날리게 뛰어도 3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날 택시 영업은 고스란히 적자다.

“얼마나 반기는지 영업 못해 손해라는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 표정을 안봐서 모르실거예요. 돈도 벌어야 하지만 더 소중한 일이니 그때만큼은 손님들도 찬밥 신세죠.”

삼척이 고향으로 3남2녀 중 맏이였다. 아홉 살 때부터 장애인으로, 가난으로 힘들게 살아왔다.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1978년에는 삼척지역에 처음으로 장애인 협회를 만들었다. 당시만해도 장애인의 삶은 충격적이었다.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가족의 방치 속에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한테 의지하지 말고 살자며 장애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아 주었어요. 용모도 단정히 하고 삶의 자세도 바꾸자고 용기를 북돋웠죠. 당시 도움을 준 ‘고려 보조기’ 사장처럼 후원자도 모았습니다.”



#양복 꿰매던 손길로 보듬는 도시락

장애인 협회를 이끌 때는 양복점을 하고 있었다. 스무살 무렵 양복기술을 배웠다. 시내에 ‘형제라사’ 양복점도 운영했다. ‘내 형제처럼 정을 나누며 살자’는 뜻에서 이름도 ‘형제’다. 그러나 양복점보다는 바깥 봉사일에 더 바빴다. 아내가 힘들어 하며 가정불화를 겪기도 했다. 게다가 형편이 어려운 친구 빚보증을 서는 바람에 평생의 재산인 양복점마저 문 닫았다.

경기 탓인지 요즘 택시영업이 신통치 않다. 한달 벌이는 1백만원 정도. 1남2녀 중 막내가 대학생이다. 사는 곳은 13평짜리 영구임대아파트. 통장을 맡아 동네에서도 할 일이 많다. 주민 대부분이 생활보호대상자. 이웃에게 집에서 할 수 있는 작은 돈벌이라도 찾아주려고 혼자 쫓아다닌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도시락에 더 신경쓰인다. 재작년 여름엔 태풍 매미가 몰아치는 바람에 배달에 애먹었다.

매주 빠짐없이 찾아오는 노란 택시 아저씨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기다리는 손님. 반갑게 인사하며 좋아서 깡충깡충 뛴다. 도시락과 함께 아이들이 좋아하는 빵과 예쁜 머리핀을 허리 뒤춤에 감추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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