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불편한 공간이 삶을 풍부하게 한다 [모형 속을 걷다/이일훈|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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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2.24 10:08:21
  • 조회: 722
건축가에게 건축모형은 꿈과 현실을 치열하게 조화시킨 보물이다. 작고 가벼운 미니어처지만 그 속에는 건축가의 바람과 건축주의 요구, 갖가지 건축관련 요인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른 흔적이 오롯이 담겼다.

‘모형 속을 걷다’는 건축가 이일훈씨가 이사를 위해 그동안 간직해온 모형들을 부숴 없애면서 쓴 글이다. 시쳇말로 피와 땀이 밴 모형을 어찌 말 한마디 없이 없애랴. 카메라로 찍은 뒤 그 모형이 간직한 건축과 사람, 삶의 이야기를 슬슬 풀어냈다.



모형은 빌딩도 있고, 단독·다세대 주택도, 사찰과 천주교교회 등 종교건축물도 있다. 이 땅에 지어져 지금 사람들의 때가 묻은 것도 있지만, 그저 저자의 가슴 속에서만 실현된 것도 많다. 건축주와 부딪치거나 죽이 맞아 신이 나서 만들어진 모형도 있고, 마음 속에만 지어야 했던 아쉬움이 묻어난 모형, 건축의 의미와 건축가의 역할 등을 되새기는 모형도 있다.

저자에게 ‘모형 부수기’는 스스로의 재탄생이자 반성이다. “모형이 작아서 나를 감싸진 못하지만 자꾸 걸어 들어가고 싶다” “내가 낳은 공간이 나를 받는다. 내가 다시 나를 낳는다”는 것이다.

책을 통해 건축에 대한 저자의 생각, 삶의 철학, 세상을 보는 눈 등 그 속내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자의 건축 철학은 이른바 ‘채 나눔’으로 모아진다. 채 나눔론은 1990년대 저자가 국내 건축계에 던져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킨 설계방법론. 한 덩어리의 집, 한 공간을 여러 채(공간)로 나누자는 이 주장은 ‘불편하게 살기’ ‘밖에서 살기’ ‘늘려 살기’라는 3가지로 요약된다.



즉 편한 것만을 추구하다 보니 모든 기능을 한꺼번에 집중시킨 현대 가옥이 나왔고, 이는 채광·통풍 등이 부실하고 인간을 나태와 권태로 이끈다는 점에서 좀 불편하게 만들자는 것. 밖에서 살기는 닫힌 내부공간 만이 아니라 외부와의 공존을 취하자는 것이다. 즉 반내(외)부 공간이 소통하는 유기적 건축을 강조한다. 늘려 살기는 짧은 동선이 합리적이라는 근대건축 이념에 대한 비판이다. 공간의 주인에게 건축가는 공간적·시간적으로 무조건 빠르게 짧게가 아니라 느림도 택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건축은 시대를 담고, 삶을 담는 그릇이다. 저자는 모형을 통해,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건축론, 곧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전한다. 그저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되새길 만한 삶을 대하는 자세다. 불편함으로써 나태하지 않고, 외부와 소통함으로써 여유있으며, 늘림으로써 오히려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 되새김질할수록 여운이 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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