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5대 잇는 ‘닥장이’父子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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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2.05 10:49:58
  • 조회: 604
[전통한지 만드는 문경 김삼식·김춘호씨]



김춘호씨(30)는 아버지 뒤를 이어 5대째 ‘닥장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마라톤을 시작했다. “백번은 울 각오를 하고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설마 마라톤만큼 힘드랴 싶었다.

아버지 김삼식씨(63)는 막상 대학을 졸업한 막내아들이 고향인 문경에서 자신의 뒤를 잇겠다고 나서자 걱정이 앞섰다. 150년 전 어쩌다 가업 아닌 가업이 돼 사위, 매형 등 친·인척을 가리지 않고 4대째 이어져 내려온 전통한지. 아홉살 어린 나이부터 54년 동안 전통한지에만 매달려온 그에게, 빛도 안 나면서 힘들기만 한 이 일은 자기 대(代)로 충분했다.

그래서 닥장이가 되겠다는 아들에게 “한지를 만들려면 적어도 몇 년은 도시에서 사회생활을 해봐야 한다”는 괜한 조건을 달았다. 돈 맛도 보고, 연애도 하면 정신차리겠거니 했다. 그러나 이 속셈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시에서 자리잡아 잘 살고 있던 춘호씨는 정확히 3년이 지나자 “아버지, 이쯤 하면 됐지요?” 물어왔다. “사귀고 있는 여자랑은 약혼해서 돌아오는 거냐?”는 아버지의 걱정에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나요. 더 큰 토끼를 택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망설임없이 답했다. 아버지는 더이상 말릴 수 없었다. “마음대로 해라. 대신 장가는 책임 못 진다”는 말밖에. 5년 전 일이다.

그때부터 부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함께 닥나무를 삶고 벗겼다. 전통한지는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자란 1년생 어린 닥나무를 써야 한다. 더 어려도, 더 커도 안 된다. 그렇게 구한 닥나무를 하루종일 삶는다. 그리고 벗겨낸 껍질이 하얗게 될 때까지 손으로 긁어낸다. 12~13시간씩 웅크리고 앉아 백닥이 될 때까지 긁어내는 일은 정말 마라톤만큼이나 힘든 과정이다.



같은 ‘전통한지’란 이름을 내걸더라도 이들 부자처럼 1년생 우리나라 닥나무로, 껍질을 손으로 긁어내 만드는 집은 멸종된 지 오래다. 거의 모든 곳이 2~3년 묵은 중국산 닥나무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껍질은 표백제에 담가 하얗게 만든다. 진짜 전통한지 방식으로 만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춘호씨네 집은 늘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가 썰매 타고 놀고 싶던 나이 어린 춘호씨는 아버지에게 붙들려 닥나무 껍질만 벗겼다. 동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아버지를 ‘딱사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하루종일 온 식구가 매달려 일하는데도 찢어지게 가난하니 같은 ‘사장’ 중에서도 ‘딱사장’만큼은 절대 되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었죠.”

그러나 철이 들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건방진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나 아니면 안 되겠구나, 내가 아니면 진짜 전통한지 수공업의 맥이 끊길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어리석을 만큼 원칙을 고집하는 이 방식이 힘들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다른 곳처럼 중국산 닥나무와 표백제를 사용했다면 여자친구와 도시생활을 포기할 가치조차 없었단 설명이다.



“‘지천명 견오백(紙天命 絹五百)’이란 말이 있습니다. 비단은 오백년을 가지만 전통한지는 천년을 간다는 말이죠. 진짜 전통한지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얗게 깨끗해지면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약품을 첨가한 전통한지는 수명이 길지 못해요.”

춘호씨는 희망한다. 도자기 장인들의 가치가 서서히 인정받기 시작하는 것처럼 적어도 10년 후면 묵묵히 원칙을 지켜온 닥장이의 ‘진짜’ 전통한지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천년을 만드는 닥장이가 고작 10년 후를 내다보지 못하고 흔들린다면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딱사장 부자가 고집하는, 힘들고 더딘 수작업이 을유년 설날 아침에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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