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땅이 주는 대로 받기만하는 나는 게으른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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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5.01.07 15:28:14
  • 조회: 521
[유기농 감귤키우는 백승익·안향숙 부부]



전업농부 1년차 백승익씨(44)는 올해 자신의 귤밭에서 첫 수확을 거뒀다. 도시생활을 완전히 정리하고 낯선 제주도에 정착한 지 4년 만이다. 심정이 어떠냐고 묻자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한다. 부인 안향숙씨(40)가 “이 사람한테 감상적인 말은 기대도 마세요. 타고나길 우직한 농부라니까요. 이제까지 도시에서 어떻게 살았나 몰라”하며 면박을 준다.



#14년차 월급쟁이

백씨는 4년 전까지 ‘한국 노바티스’란 외국계 제약회사의 직원이었다. 주5일제에 연봉도 남부럽지 않았다. 평범한 도시 직장인이던 백씨에게 이상한 조짐이 보였던 건 94년의 어느날. “여보, 나 소 키우고 싶어.” 뜬금없는 남편 말에 부인 안씨는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근처 텃밭에 농작물 키우는 게 취미이긴 했지만 설마 이젠 소까지? 때마침 다행히도 소값 파동이 일어나 남편의 소타령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백씨는 쉬는 주말에도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눈 떴다. 아무도 보지 않는 이른 아침 시간대의 TV 농업 관련 프로그램을 꼼꼼히 챙겨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TV에 소개된 농가들을 직접 가봐야겠다며 틈날 때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녔다.

“직장에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고졸 출신인 제가 극복하기 힘든 학벌, 연줄, 갖가지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렇지만 땅은 정직해서 노력한 만큼 돌려주죠. 게다가 농업은 정년도 없는 평생직장 아닌가요. 허허.”

더군다나 백씨는 노바티스 공장이 있는 안산 반월단지에서 14년간 일하면서 얻은 온갖 알레르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공해로 인한 일종의 직업병이다. 부인 안씨조차 공장에 들어가는 남편을 향해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려 차 창문을 내렸다가, 훅하고 밀려들어오는 매캐한 공기 때문에 도로 창문을 올려버릴 정도였다. 백씨는 돼지고기, 소고기 심지어 과일을 먹어도 두드러기와 복통을 호소했다. “사과 과수원집 아들이 알레르기 때문에 사과를 못 먹게 됐으니 말 다했죠.”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봐왔던 안씨도 조금씩 남편의 전원사랑에 동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흙을 밟고 살아본 적도 없는 안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편에게 ‘세뇌’당한 셈이다.

그러나 암초에 부딪쳤다. 고향인 경북 의성에서 아버지의 과수원을 이어받은 큰형이 거세게 반대한 것이다. 농협에서 정년퇴직한 둘째형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농가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형이었다. “전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농사일에 관심이 많았는데 큰형은 그때 구경도 못하게 했어요. 고생길은 자기로 족하다는 거였죠.”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려던 부부의 꿈은 그렇게 무너졌다.



#1년차 감귤농부

그래서 아예 제주도로 방향을 돌렸다. 2000년 여행차 놀러갔던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당장 그 길로 사직서를 내고 짐을 꾸렸다. 좌충우돌, 초짜 농부의 유기농법 귤농사 고생길은 그렇게 시작됐다.

쉽지 않았다. 농약도, 제초제도 주지 않는 이들에게 이웃에선 “그러다 귤 안 열리면 너 어떡할래”라는 걱정어린 말 뿐. 한번은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밭에 뛰어들어오더니 “저놈, 저놈 쫓아내라, 나무 다 죽인다”며 노발대발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안산 반월공단에 살면서 그 누구보다 깨끗한 자연과 먹거리를 소망했던 그들이다. 농약에 찌든 땅이 쌀겨·해초 등으로 만든 자연비료를 섭취하며 되살아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반년쯤 지나니 땅에 지렁이와 미생물이 돌아왔다. 가을이 되니 샛노란 귤들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하더니 나무마다 탐스럽게 매달렸다. ‘저놈 쫓아내라’ 하던 사람들도 이젠 “어? 그래도 열리긴 열리네”라고 한마디 던져준다.

한동안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백화점 카달로그만 하염없이 뒤적거리던 안씨도 귤꽃향기에 푹 젖은 억척 농사꾼이 다 됐다. 물론 아직도 벌레나 뱀을 보면 징그러워서 도망가지만. 그런 부인을 보며 백씨는 허리를 잡고 웃는다.

직거래를 고집하는 부부는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주문량만큼만 나무에서 귤을 딴다. 미리 따서 창고에 넣어두면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이유다. 나무에서 갓딸 땐 새콤하던 귤이 택배로 배달되는 기간동안 박스에서 알맞게 달아진다.

못내 다시 한번 시골생활이 후회스럽진 않윰캅?물었다. “내가 흘린 땀에 보답해주는 땅의 대가를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땀의 대가를 함께 나누어 먹는 꿀 같은 맛은 더더구나 상상도 못할걸요.”

밤새 귤들이 잘 잤나 궁금해 아침마다 눈이 번쩍 떠진다. 남편은 마냥 신이나 아침이슬 맞으며 귤밭을 돌아다닌다. 아내는 아침심사를 위해 남편을 찾으러 귤나무 사이를 헤치고 다닌다. 하루종일 감귤과 대화하는 두 사람, 제주 친구들은 사랑과 정성으로 익어가는 하루하루가 소중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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