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라디오 잡음 사이로 세상을 즐긴다… 한국 단파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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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10.18 11:31:41
  • 조회: 1341
세련된 것이 대접받는 디지털 시류(時流)를 거슬러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단파클럽(cafe.dau m.net/danpa) 회원들은 아날로그식 단파 라디오에 귀기울이며 여가를 보낸다. 티없이 맑은 FM방송 대신 잡음 섞인 단파방송에 매료돼 있다. 주파수를 맞추는 번거로움에서 더 재미를 느낀다. 이들은 “잡음은 귀가 알아서 걸러 내준다”며 “오히려 노이즈를 즐긴다”고 말했다.

디지털 코드를 타고 세상이 제 아무리 빨리 변해도 아날로그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은 따로 있다. 비록 형식이 뒤처져도 내용은 디지털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있다.



회원 고재영씨(45·개인사업)는 22살 때인 1980년 건강 이상으로 집에서 쉬는 사이 라디오를 자주 듣다가 우연히 일본 NHK 라디오 방송을 처음 들었다. 이후 단파방송에 눈을 떠 필리핀 ‘라디오 베리타스’ 등 각국 방송을 청취하기에 이르렀다.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방송이나, ‘안데스 소리’라는 일본어 방송을 들었을 때는 묘한 느낌마저 들었어요.”

방송을 매개로 고씨와 친해진 클럽 고문 권대근씨(38·회사원)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단파방송을 들었다. 당시 건설 붐이 일었던 중동에 다녀온 친지로부터 ‘마란츠’ 라디오를 선물받았다. 국내 제품에선 보이지 않던 ‘SW’(단파) 표시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주파수 조절기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발음이 이상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일본 NHK 한국어 방송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그 뒤 방송 시간대만 되면 라디오 앞에 엎드렸다.

“항공우편으로 편지를 보냈어요. 어느날 수신을 증명하는 카드와 안내 책자 등을 소포로 보내주더군요. 그 재미에 더욱 빠져 들었죠.”

회원 윤종찬씨(30·회사원)는 93년 대학교 무선아마추어통신(HAM) 동아리에서 중국방송 CRI를 듣다가 해외소식이 재미있어 지금까지 왔다. 94년 초 NHK 라디오와 전화 인터뷰까지 했다.

단파 라디오 때문에 간첩으로 오인 받은 황당한 일은 이제 추억거리로 남았다. 불과 7년 전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상가에서 벌어진 해프닝. 어디를 가든 라디오를 끼고 다니는 고씨는 이날 공중 화장실에서도 라디오를 틀었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주변에 경찰관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중국방송에서 나온 북한 말투를 수상히 여긴 시민의 투철한 신고정신 때문이다. 다행히 현장에 아는 형사가 있어 간첩 누명은 쓰지 않았다.

클럽 회장 오종원씨(34·회사원)도 91년 새로 이사간 충북 청주시에서 NHK의 북한말투 방송을 듣다가 이웃 신고로 간첩으로 몰릴 뻔했다. “70, 80년대 중국이나 동유럽에서 오는 소포에는 당국에서 교묘히 뜯어 다시 붙인 흔적이 선명했다고 해요.”

단파 클럽은 국내 단파방송 인구를 약 2만~2만5천명으로 추산한다. 60, 70년대는 ‘미국의 소리(VOA)’가 주류였으나, 최근에는 다양한 방송을 듣는다. 고씨는 “처음에는 대부분 어학공부하려고 시작한다”며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청취를 포기하지만, 반대로 어학공부보다도 차츰 단파방송 자체의 매력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단파방송 마니아들은 라디오로 자신을 돌아보고 세상을 내다본다. 디지털로 깔끔하게 포장된 상태가 아닌, 잡음 섞인 솔직한 세상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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