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공연] “재즈 인생이 행복해요”… 클라리넷 50년 이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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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10.14 10:12:59
  • 조회: 1675
“세상과 이별하는 날까지, 스윙하고 또 스윙할 겁니다.”

재즈 인생 50년. 칠순을 바라보는 클라리넷 연주자 이동기는 여전히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서울 홍대앞 뒷골목에 자리한 재즈 카페 ‘문글로우’(Moonglow). 어둑한 조명이 다행스러웠다. 맞은편에 앉은 이 노(老) 연주자는 새색시처럼 부끄럼을 탔고,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달려온 탓에 이마에 땀방울까지 송송 맺혀 있었다. 20대 젊은 연주자들에게도 절대 ‘하대’를 하지 않는 몸에 밴 겸손. 어느덧 한국 재즈계에서 ‘원로’ 소리를 듣는 그는 “원로라뇨? 제가 무슨…” 하며 얼굴을 붉혔고, 테이블 한쪽에 얌전하게 올려놓은 검은 몸체의 클라리넷을 자꾸 쓰다듬었다.



충남 강경에서 태어난 이동기는 대동상고 1학년 때부터 클라리넷을 불었다. 부친의 영향이 컸다. 작고한 부친 이준영씨는 ‘실버스타’라는 밴드를 조직해 초창기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했던 색소폰 연주자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몸담고 계시던 밴드에 들어갔지요. 실버스타는 이미 해산했고, 당시엔 ‘NBC’라는 이름의 밴드였어요. LP에서 들은 연주를 따서 한 소절씩 흉내내며 연습했지요. 그렇게 어깨 너머로 배운 재즈라서, 아직도 서툰 것이 많아요.”

50년 동안 클라리넷을 품고 살아온 그는 “난 지금도 재즈에 대해 잘 모른다”며 “요즘 후배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와서 아주 잘한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엔 재즈가 너무 개인기로 흐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재즈는 예나 지금이나 ‘돈 못 버는’ 음악. 그 중에서도 클라리넷은 더욱 궁핍했다. ‘내 이름은 소녀’를 불렀던 왕년의 인기가수 조애희와 결혼해 화제를 뿌렸던 이동기는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즈를 버렸다. 정훈희가 히트시켰던 ‘그 사람 바보야’ 등의 노래를 만들었고, 시내 곳곳의 나이트 클럽을 돌아다니며 팝을 연주했다. 호구지책이었다.



“후회스럽지요. 물론 그땐 어쩔 수 없었지만… 제 음악 인생의 가장 심각한 슬럼프였습니다. 그렇게 나이트 클럽을 전전하다가 마흔 살이 넘었고, 결국 음악을 포기했어요. 한 2년 동안 집에 틀어박혀 꼼짝 안 했어요.”

재기의 시간은 84년이 되어서야 찾아왔다. 어느 날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이 전화를 걸어왔다. “다시 한번 해보자”는 제안. 그는 박성연이 운영하던 재즈 클럽 야누스에서 한 달에 한번 무대에 서 달라는 요청을 엉겁결에 받아들였다. 하지만 더럭 겁이 났다. 아니나 다를까 몸이 영 말을 안 들었다. 이미 재즈의 여신은 그에게서 멀리 떠나 있었다.

“아, 정말 못 따라가겠더군요. 재즈를 다 잊어버렸어요. 지금도 제가 이판근 선배나 강대관 선배한테 정말 고마운 게, 그렇게 자주 틀리는 데도 계속 참고 기다려 주었어요. 연주 끝나면 그 양반들이 ‘동기야, 너 오늘 또 틀렸다’며 놀려댔죠. 제가 좌절해서 재즈를 떠나지 않도록 진심으로 배려해주었어요.”

쉼 없이 듣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3~4년이 지나서야 왕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제 이동기는 한국 재즈 클라리넷의 독보적 존재. 2년 전 세상을 떠난 엄토미(영화배우 엄앵란의 숙부)의 뒤를 잇는 유일한 클라리넷 연주자다.



어느덧 밤 9시. 그는 아까부터 계속 만지작거리던 클라리넷을 들고 드디어 무대에 올랐다. 한국 재즈의 노장들이 올라선 세 평 남짓한 무대. 좁다. 드럼의 최세진(74), 트럼펫의 강대관(69), 트롬본의 홍덕표(75), 피아노의 신관웅(58)… 그들이 연주한 세월의 크기에 비해 무대가 작고 초라하다. 그래도 다들 행복해 보인다. 40년 혹은 50년 이상씩 재즈의 불모지를 지켜온 외골수들. 최세진이 낡은 스틱으로 드럼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불멸의 스윙 ‘Night Train’. 힘찬 기적이 울리면서 6명의 재즈맨을 태운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한다. 매주 목요일 밤, 홍대 앞 ‘문글로우’. 한국 재즈의 노장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무대는 좁아도 감동은 적지 않다. (02)324-5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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