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밥상 수십개 차려도 그때가 좋았어… 괴헌종가 6대종부 김영교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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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09.24 17:08:48
  • 조회: 509
지난 14일 경북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괴헌고택. 김영교(金英嬌·87) 할머니는 저녁 햇살이 들어오는 안채 툇마루에 앉아 가지를 다듬고 있었다. 세월을 못이겨 허리는 굽고 얼굴과 손엔 주름이 가득했다. 그 손으로 아직까지 손님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고 제사를 받든다. 연안 김씨 만취당파 괴헌종가 6대 종부. 나이 열일곱에 괴헌 6대 종손(김창기·1993년 작고)에게 시집왔으니, 종부로 살아온 지 올해로 꼭 70년이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앞산이 이마에 턱 붙어있는 걸 보고 앞으로 우예 사노 싶었지. 친정집은 앞이 탁 트였는데…. 시어머니도 사셨으니 나도 살자, 했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의성 김씨 가문 김홍기 댁의 셋째 딸. 친정은 13대가 연이어 벼슬을 한 명문 대가였다. 봉화읍 한 번 나가보지 않고 곱게 자랐다. 시집오자마자 부엌에 들어갔다. 계절이 바뀔 때까지 ‘사랑어른’(남편)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했다.

시부모, 시조부모에 식구가 수십명. 하인만 예닐곱명 되는 대갓댁이었다. 사랑채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적을 땐 5~6명, 많을 땐 10명이 넘었다. 각자 상을 따로 받던 때. 끼니마다 밥상을 30~40개씩 차렸다. 떡 만드는 하인, 식모, 심부름꾼이 따로 있었지만 앉아서 밥 먹을 틈도 없이 바빴다. 밤엔 옷 짓고 다듬이질을 했다.

제사는 또 얼마나 많던지. 4대 기제(忌祭)에 철마다 올리는 시제(時祭), 명절 차례까지 달마다 돌아왔다. 거기다 단오 제사, 유두 제사, 동지 제사, 섣달 그믐 제사, 집 수호신께 올리는 성주 제사까지 지냈다. 정월 초사흘엔 동네 사람 모아 놓고 떡국과 술 한잔을 돌렸다.

“지금도 손님 치는 건 하나도 겁 안나. 그래도 돌아보면 그때가 가장 좋았지. 해방되고 토지개혁 하면서 세상이 히뜩 디비졌어(뒤집어졌어).”

대갓댁 며느리 되고, 마님 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다. 8·15 해방 직후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지주계급’은 땅을 내놓아야 했다. 논밭 수백마지기가 30마지기로 줄었다. 시아버지는 ‘사랑어른’과 함께 서울로 가라고 권했다. 목탄차(기차)로 하룻길을 달려가 서울 종로구 수인동에 집을 얻었다.

혼자 살림이 아니었다. 남편, 시동생 2명, 시사촌 동생, 아들까지 ‘보필해야 할’ 남자가 6명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모든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대학생인 큰 시동생은 공산주의 사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밤마다 친구를 떼로 데려와 ‘삐라’ 만들고, 사흘이 머다하고 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벌어졌다. 큰 시동생은 사상대로 월북했다. 작은 시동생은 잠자다 인민군에게 학도병으로 차출됐다. 피란갈 틈도 없었다.

모두 죽더라도 장손은 살려야 했다. 아홉살 난 아들을 열차 지붕에 태워 고향으로 보냈다.

시아버지는 ‘전쟁 나서 서울 자식들 굶어죽는다’며 소달구지에 쌀가마니 지워 서울로 나섰다. 죽령 넘어 여주쯤 왔을까. 비행기 폭탄이 떨어져 어깨와 다리에 파편을 맞았다. 남편은 열일 제쳐두고 달려갔다. 아버지를 업고 보름 밤낮을 걸어 고향집에 도착했다. 종부는 재봉틀, 이불, 제기를 모두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고 고택으로 내려왔다. 1·4 후퇴 무렵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사람들이 제기만 남겨놓고 말카(몽땅) 다 파갔대. 그 제기가 괴헌 선조가 쓰시던 200년 된 제기야. 후에 갖고 와서 지금도 제사 때 쓰고 있지.”

다시는 서울로 가지 못했다. 시아버지는 석달을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들리는 소문에 서울집은 인민군 사무실이 됐다고 했다. 무서워서 올라갈 수 없었다. 휴전 후 아는 사람에게 팔아달라고 집문서를 맡겼더니, 집 판 돈을 들고 도망가 버렸다. 그 많던 전답도 모두 없어졌다.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가야 했다.

“풀 한 포기 안 뽑아 봤는데, 밭에 나가봐야 뭘 아나.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있는데, ‘하소’ 소리가 잘 안 나오대. 나중에 사람들이 반말한다고 수군댔다대.”

농사 짓고, 안되면 소작을 줬다. 식모가 없으니 혼자 부엌으로 들어갔다. 천상 학자인 남편은 사랑에서 책 읽고 글 짓고, 집안 살림은 온전히 종부의 몫이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에 행랑채와 정자가 무너졌을 땐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물이 안마당까지 들어와 넘실거렸다. 집 앞 내성천은 그 후로도 열번 넘게 범람했다. 시조부모와 시부모 네 명의 3년상을 모두 치렀다. 모두 합쳐 12년. 끼니마다 상석 올리고, 곡하고, 색깔 든 옷 못 입고, 얇은 광목천으로 겨울을 났다.



아들딸 7남매를 봤다. 큰아들 종국(62)은 무역회사를 차렸고, 둘째 아들 종경(57)은 대기업 임원이 됐고, 셋째 아들 종한(43)은 대학교수가 됐다. 딸들은 인근 명문가의 며느리로 보냈다. 자식은 하나둘 대처로 떠났고, 고택은 점점 비어갔다. 사랑어른이 세상을 뜬 뒤엔 홀로 집을 지켰다. 달마다 제사 모시고 날마다 집안을 쓸고 닦았다.

3년 전 큰아들이 고택에 돌아온 후 손님이 부쩍 늘었다. 사흘이 머다하고 찾아오는 손님이 조금도 귀찮지 않다. 집안의 보물인 고서를 보러 오는 교수·학생들도 반가이 맞는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을 기웃거리는 관광객이 있으면 붙들고 감주라도 한 잔 대접해야 마음이 편하다. 제사 모시고 손님 접대하는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을 사람의 도리로 알고 평생 살았다. ‘사람 사는 집엔 사람 많은 게 좋다’는 말은 이제 입버릇이 됐다.

남은 걱정이 있다면, 솜씨와 정성을 물려 줄 손자며느리를 찾는 것. 종부로 살아온 김할머니는 “직장 다니고 날뛰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앉기 힘들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다시 태어나도 종부로 살고 싶을까.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는다.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힘든데…. 사람이 ‘사람질’ 하려면 괴롭고, 안 하려면 쉽지. 인생이 길고도 짧아. 내 이야기 아직 10분의 1도 못했어. 글을 지을 줄 알면 책을 쓸 거야. 누구나 마음 속엔 굽이가 천 개씩 있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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