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모두 제몸뚱이 값은 하고 가지요”… ‘고물상’20년 김윤섭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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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09.01 13:41:57
  • 조회: 710
컴퓨터 모니터, 스탠드, 가스통, 선풍기, 종이박스, 전깃줄…. 한때는 가정과 사무실에서 유용하게 쓰였을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은 똑같은 ‘고물’ 신세다. 오직 무게로 인정받는다.

김윤섭씨(60)는 고물과 20여년 세월을 살았다. 처음엔 작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누볐다. 5년 뒤 고물 팔아 모은 돈으로 1t짜리 수집용 트럭을 샀다. 5년 전부터 서울 종로구 교남동 낡은 한옥에 터 잡아 중간단계 고물상을 하고 있다.

신문 등의 파지는 ㎏당 50원이다. 철근은 ㎏당 50~100원.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무가지 신문 몇 뭉치를 모아온 할머니는 1,800원을 받았다. 리어카에 프라이팬, 냉장고 문짝, PC본체 등 한짐을 가져온 중년남자는 5,500원을 손에 쥐었다. 김씨는 수동저울로 무게를 달아 장부에 적은 다음 돈을 내준다. 저울은 최대 500㎏까지 달 수 있다.

영업방식은 앉은 자리에서 고물을 사 다시 대형 고물업자에게 되파는 식이다. 중간 마진은 20% 정도. 종이박스는 3t짜리 트럭을 채울 정도로 쌓여야 고물업자를 부를 수 있다. 4~5일 모아야 가능하다. 인건비를 따지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폐지 사이 끼여 있는 비닐과 어물쩍 섞여온 쓰레기를 골라내야 한다. 부피가 크거나 길다란 고철은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정리한다. 비좁은 마당에 고물을 잘 챙겨 층을 만들려면 하루에도 몇번씩 작업해야 한다.



“고물상 하려면 터가 적어도 200평은 돼야 하는데 여긴 50평밖에 안돼요. 장소가 좁아 할 일이 많죠. 번잡스럽고.”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 중구 충무로 인쇄골목에서 잘 나가는 기술자로 일했다. 무협지와 소설책이 인기를 끌어 인쇄업이 호황을 누릴 때였다. 보름 동안 하루 3시간씩만 잠자며 일한 적도 있다. 그때 공무원 일당이 1만8천원. 밤샘작업까지 하면 일당이 그 네 배가 됐다. 그래도 부모님과 삼형제를 거느린 대가족의 생계를 잇기 바빴다. 전남 함평이 고향으로 6·25가 끝난 뒤 일곱 살 무렵 부모 손을 잡고 서울에 올라왔다. 독립문 근처 무허가 판자촌에서 자랐다.

평범한 행복도 잠시. 조용히 불행이 찾아왔다. 시름시름 병을 앓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인쇄에 컴퓨터가 도입되면서 갖고 있던 기술이 쓸모없게 됐다. 일자리를 잃었다. 노부모와 자식들 돌보느라 아내의 빈자리를 쓸쓸해할 틈도 없었다. 리어카를 끌고 고물을 줍기 시작했다.

“내 나이 마흔이었어요. 딸린 식구만 없으면 처녀 장가도 갈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있나. 이제껏 좋아서 홀아비로 살았겠어요. 나도 힘들고 쓸쓸했지. 남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첫째·둘째아들이 장가들어 각각 살림을 차렸다. 막내도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니 아버지로서 짐은 다 덜었다. 이제 한몸 추스르며 살면 된다. 막내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배우가 된다고 설치더니 드라마와 영화 1,000여편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이젠 이름 석자를 대면 알 만한 배우가 됐다. SBS TV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에 어린 최민수 역을 맡았던 김정현(28)이다. 요즘은 SBS TV 주말극 ‘작은 아씨들’에 주연급으로 나오고 있다. 두 달에 한번씩 아버지를 찾아와 삼겹살이나 해물탕으로 저녁을 함께 한다.



서대문 가까이 따로 살림집이 있지만 거의 고물가게에서 지낸다. 대문이 없어 고물을 지켜야 한다. 고물상의 하루는 해뜨면 시작되고 해지면 끝난다. 새벽잠 없는 노인이 신문뭉치 들고 마수걸이로 찾아온다. 외환위기 이후 고물을 줍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임자 없는 종이박스나 고철을 두고 경쟁이 치열해졌다. 요즘은 1t짜리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고물을 수집하는 사람이 많다.

가게가 있다고 하지만 앉아 있는 시간이 없다. 어린아이 오줌같이 찔끔찔끔 신문 한두 뭉치, 냄비 몇개씩 들고 오는 사람이 많다. “돈벌기 힘들구마잉!” “아유 그럼요, 힘들죠.” 무게를 달며 말 한마디라도 다정하게 건넨다. 하루에 서너 번씩 고물을 가져오는 어느 노인은 제 집처럼 찬장 뒤에 숨겨놓은 소주병을 꺼내 한잔 들이켠다. 떠돌이 고물상의 쉼터도 된다.

고물은 거짓이 없어 좋다. 생김새나 과거를 내세우지 않는다. 무게로만 값어치를 따질 뿐이다. “이젠 아무런 욕심 없어요. 남한테 피해주지 않고 내 일 하며 살면 되는 거죠.” 인생도 고물처럼 담백해지는 것일까. 해질녘 고물상 주인은 제 몸둥이를 닮은 고철 한 개를 더미 위로 휙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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