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얼굴은 그을리지만 마음은 깨끗해지죠”

    이 게시글을 알리기 tweet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08.05 09:48:50
  • 조회: 573
강원 인제군 남면 남전리. 소양강 줄기를 따라가다 내린천 상류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초입. 수북하게 쌓여 있는 통나무 너머 희뿌연한 연기가 솔솔 피어오른다. 연기는 네 가닥. 색깔과 굵기가 모두 다르다.

“숯가마는 며칠간 불을 땠는가에 따라 연기의 색깔과 굵기가 다르지요. 가장 가늘고 색깔이 진한 게 이제 거의 다 탔다는 표시입니다.”

강원참숯 백태환 사장(45). 2001년부터 숯가마 5기를 설치, 참숯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인제는 30여년 전까지 조선시대 궁궐 진상품으로 유명한 ‘숯둔골 참숯’을 생산한 지역. IMF사태 때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에 정착한 백사장은 올해부터 일을 거들고 있는 처조카 장세진씨(31)와 함께 그 옛날 ‘숯둔골 참숯’의 명성을 되살리고 있다. 1년 생산량은 250t 가량. 품질을 인정받아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수출했다. 지금은 내수를 대기에도 벅차 수출물량을 배정하지 못하고 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뒤 누나들 도움으로 자란 백씨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고3 때 중퇴했다. 중국집 배달원부터 시작해 리어카 행상, 형틀목수 등 안해본 일이 없다. 그나마 8년 정도 다닌 회사도 IMF로 사정이 나빠지면서 자진해서 나와야 했다.

평소 관심을 둔 숯사업을 벌이기로 마음먹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무작정 숯 파는 곳을 찾아다녔다.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과 청계천 헌책방을 수없이 뒤졌다. 무턱대고 찾아간 홍천의 한 숯공장에서 숯을 사서 지금의 숯가마터에서 팔기 시작했다.



비닐하우스를 지어놓고 3년간 먹고 자며 참숯을 팔았다. 겨울 아침 평균기온이 영하 18도인 곳에서 나무난로에 의지해 지냈다. 휴대용 가스버너에 밥을 직접 해먹었다. 그는 “IMF 때문에 부도내고 산골로 도망온 사람으로 오해받았다”며 웃었다. 주변에선 숯을 누가 사겠느냐고 했다. 당시만 해도 숯은 고기를 굽거나 간장을 만들 때 쓰는 것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로 가서 시장통을 훑고 다니면서 거래처를 만들었다. 외상값을 못받은 적도 여러번이다.



숯의 효능이 차츰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2001년 강원과 경기의 숯가마를 직접 조사한 뒤 지금의 숯가마를 지었다. 보통 숯가마 하나에 80㎏짜리 참나무 100여개가 들어간다. 1,300도 가까운 온도의 불로 1주일을 쉬지 않고 태워서 나오는 참숯은 원래 참나무의 10분의 1 크기. 숯의 강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7일을 굽고 나서 하루를 더 묵힌 뒤 꺼낸다. 백씨는 지금도 1주일에 두번은 서울 경동시장에 물건을 대주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나선다. 산에 가서 재료인 참나무를 살피기도 한다.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품질을 떨어뜨리면서까지 더 생산하고 싶지는 않다.

처조카 장씨는 5개월 전 11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과 함께 내려왔다. “풍수지리는 모르지만 이곳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젊음이 무기였지만 도시에서 살아온 그로서는 항상 몸을 움직여야 하는 시골생활이 버겁기도 했다. 수십㎏ 하는 통나무를 나르고 고열 속에서 일하는 게 힘들지만 지금은 요령이 많이 생겼다. 항상 숯가루가 얼굴에 묻어서 ‘무장공비’라고들 하지만 마음만은 편하다. “요새 사람들은 지저분한 일을 안하려고 하지만 숯은 다릅니다. 도시에서 나오는 안좋은 물질을 정화하는 게 숯이지요. 예전에는 숯을 고기 구워먹는 데만 쓴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새벽같이 일어나면 숯가마부터 살피는 백씨와 장씨. 두 사람은 얼마전 조그마한 나무통을 하나 만들었다. 숯을 만들고 남은 열을 이용하는 숯가마찜질을 통해 번 돈을 저축해 불우이웃돕기에 사용하기 위해서다.

  • 이글은 실명인증이 완료된 회원이 작성한 글입니다.
  • 목록으로
  • 글수정
  • 글삭제
  • tweet tweet
  •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글쓴이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