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혼’을 굽는다 문경의 8代 도공 김영식·선식·경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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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06.14 09:41:47
  • 조회: 473
문경 하늘재는 영남과 충청을 잇는 고개다. 2,000년 역사의 옛길 입구엔 흙으로 만든 가마가 하나 있다. 161년 전 김영수란 이 마을 도공이 지었다. 도공의 기예는 아들·손자로 면면히 이어져 8대 250여년에 이르렀다. 가마에 불을 지피는 김영식(35)·선식(33)·경식(37)씨. 2살 터울의 사촌들은 조상의 태가 묻힌 문경 땅에서 같고도 다른 그릇을 빚는다.



# 관음리 도자기집 아들

관음리 망댕이가마(경상북도 민속자료)는 지난 겨울 폭설로 지붕이 내려 앉았다. 집안의 장손인 김영식씨가 가마를 지킨다. 가마를 지은 김영수는 가마로 올라가는 길 옆에 묻힌 지 100년이 넘었지만, 가마와 그릇 짓는 솜씨는 자손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잡풀이 무성한 가마 옆엔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폐가 한 채가 남아 있다. 20여년 전엔 초가집 두 채가 더 있었다. 6대 도공 교수와 큰아들 천만이 아들딸 7남매와 함께 살았다. 교수의 셋째 아들 정옥이 바로 이웃이었다. 끼니가 없을 만큼 가난한 가족은 매일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었다. 교수는 멀리 일본에서 배우러 올 정도로 솜씨 좋은 도공이었지만 정작 벌이는 시원찮았다.

천만의 맏아들인 영식과 정옥의 맏아들 경식은 학교가 파하면 요장으로 직행했다. 일꾼이 따로 없던 때. 아이들은 디딜방아를 밟아 유약 재료를 빻고, 흙을 밟아 공기를 빼야 했다. 친구와 놀지도 못하고 매일같이 일로 지친 아이는 ‘커서는 이런 일 안 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1973년 세상을 떠난 뒤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요강과 항아리를 만들고, 몇 평 안되는 논밭을 갈아 먹고 살았다. 그릇 주문이 좀처럼 없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물레를 놓지 않았다. 정옥은 지난 82년 독립해 문경 읍내에 요장을 차렸다.



# 스님 단골집 막내 아들

관음리 입구 갈평리엔 교수의 둘째 아들 복만이 살았다. 공부에 재주가 있던 둘째 아들은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을 다녔다. 가난으로 공부를 마치지는 못했다. 복만은 갈평의 신북고등공민학교에서 한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도공 집 아들은 결국 39살에 제 손으로 가마를 짓고 그릇을 굽기 시작했다. 복만은 그림 솜씨가 좋았다. 용이며 포도를 그린 다관(茶罐·찻물을 달이는 그릇)은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다. 인근 봉암사 스님이 차를 들 때면 복만의 다관을 찾았다.

복만의 막내 아들 선식은 어려서부터 흙장난을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하다 방위 복무를 위해 91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가 장정에게도 힘든 도자기 일을 하는 것을 본 선식은 팔을 걷어붙였다. 고생길이 훤하다며 아버지는 두 손을 저어 반대했지만, 아들의 고집은 굳었다.



# 혈맥 따라 흐르는 도공의 피

장손인 영식씨는 91년 도공의 길로 들어섰다. 갑갑한 시골을 벗어나고 싶은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군복무 중인 89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스무 살에 가장이 된 그가 아는 것이라곤 어릴 적 보고 자란 흙과 불밖에 없었다.

영식씨는 작은 아버지 정옥씨를 찾아갔다. 도예는 누가 소리내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전부 어깨 너머로 훔쳐봤다. 작은 아버지의 그릇을 보고 몇 번이고 다시 만들었다. 이따금 핏줄을 타고 흐르는 육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흙과 함께 자라 출발점이 남과 달랐다. 2년 만에 자신의 그릇을 구워냈다. 아버지의 손님이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2002년 첫 개인전을, 지난 5월엔 두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선조의 가마에서 그릇을 굽다가 4년 전 옛 가마 아래에 자신의 가마를 지어 올렸다.

정옥씨의 아들 경식씨도 도공의 대열에 합류했다. 아들은 가문의 내력과 아버지의 열정을 이해했다. 이미 고등학교 때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경식씨는 95년 부친의 요장에 들어갔다.

정옥씨는 96년 중요무형문화재 사기장으로 지정됐다. 가르침엔 말을 아꼈지만, 아들과 장손을 무형문화재 전수장학생으로 등록시켜 자신의 기술을 전했다. 조카 선식씨에겐 자기의 작품 중 가장 좋은 것을 주며 똑같이 만들어 보라고 했다. 가문의 비법은 책에 쓰여 있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따라 하며 자연스럽게 온몸으로 익혀야 했다.



#3명의 8대 도공

세 가족은 관음리 주변에 산다. 영식씨는 ‘조선요(朝鮮窯)’를, 경식씨는 아버지와 함께 ‘영남요(嶺南窯)’를, 선식씨는 2002년 작고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음요(觀音窯)’를 꾸려가고 있다. 한달에 한번은 한자리에 모여 집안일을 의논하고 통음(痛飮)도 한다.

“그릇이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가문에 전해오는 청화백자(靑華白磁)를 하니까요. 인식을 바꿔보자고 저희끼리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청화백자를 계승하면서도 독특한 자기만의 색깔을 내야지요.”

사촌 중 맏이인 경식씨는 무형문화재의 아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들에 비하면 유리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스럽다. 경식씨는 “동생들이 나보다 더 잘하면 그쪽이 문화재 전수자가 돼야 한다”면서도 “집안 전승의 청화백자를 계승하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영식씨도 마찬가지다. 장손으로서 집안 전승 자기를 원형 그대로 재현하고 싶다. “우리 아버지가 문화재면 좋겠다는 마음이 왜 없었겠냐”면서도 “아버지는 실력이 좀 모자랐던 것 같다. 이런 말은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 정도도 못했을 것”이라며 정옥씨를 친아버지처럼 모신다.

선식씨의 꿈은 조금 다르다. 부친에게 전수받은 경명진사자기에 힘을 쏟고 있다. 붉은빛·푸른빛·노란빛이 함께 도는 독특한 자기다. 선식씨는 또 댓잎 문양을 활용한 도자기를 개발했다. 꿈은 전통 기법을 응용한 다양한 도자기를 만드는 것. 선식씨는 이달초 대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9월엔 경식씨가 전시회를 갖는다.

세 사촌과 육촌이 모이면 스무명 남짓한 대식구가 된다. “선식아! 니 전시회 어찌 됐노. 그릇 많이 팔았으면 한잔 사야지.” “내 짬내서 대구 내려가보께.” 같은 길에 선 이들은 일이 많으면 품앗이 삼아 서로를 돕는다. 사촌들은 “지금까지 선조가 이뤄 놓은 것을 우리가 지켜가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250년 역사의 경주 김씨 계림군파 도공 가문의 8대가 누가 될지 아직 아무도 말할 수 없다. 한명일 수도, 3명이 될 수도 있다.

가마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만 확실하다. 160여년 전 지은 가마엔 원형 보존을 위해 더 이상 불을 넣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은 영식씨의 조선요로, 경식씨의 영남요로, 선식씨의 관음요로 옮겨져 더욱 크고 붉게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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