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인] [점점 사라지는 것들] 기다림이 있었기에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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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교차로협의회
  • 04.03.10 09:46:21
  • 조회: 497
“안녕하세요, 동욱입니다. 오랜만에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멘트를 바꿨습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삐삐 호출은 1번, 음성 녹음은 2번을 눌러 주십시오.” 강동욱씨(29·경기 광주시 경화여고 영어교사)는 아직도 무선 호출기(삐삐)를 쓴다. 벌써 9년째다. 휴대폰은 없다. 주머니에서 호출음이 들리면 바쁘게 공중전화를 찾는다. “당연히 불편하다”면서도 삐삐를 놓지 않는다. 한달 사용료가 1만7백원. 대략 휴대폰요금의 5분의 1 선이다. 그러나 단지 절약하기 위해서 삐삐를 고수하는 건 아니다.

“휴대폰이 보편화하면서 ‘빨리 빨리’가 삶의 방식이 돼버린 것 같아요. 사실 삐삐 호출하고 전화 기다리는 동안을 못 참을 만큼 바쁜 일은 없잖아요. 이 작은 기계가 제겐 약간의 여유를 찾아주는 셈이죠. 게다가 삐삐에 얽힌 추억이 많아 쉽게 바꿀 수가 없네요.”



1990년대 중반 삐삐는 전국민의 필수품이었다. 82년 한국이동통신이 시작한 무선호출서비스는 97년말 전국 가입자 1천5백만명을 넘어서는 전성기를 맞았다. 전성기는 매우 짧았다. 98년 이동전화 요금이 크게 내리면서 澁?사용자들이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98년말 9백18만명, 99년 3백3만명, 2000년에는 45만명으로 줄어들었다. 현재는 10만명 정도다.

80년대만 해도 카페나 술집에서 삐삐 호출음이 들리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삐삐는 의사·군인·안기부요원이나 쓰는 물건이었다. 93년 무선호출사업자가 크게 늘고 기기 값과 요금이 내리면서 삐삐는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당시엔 검고 투박한 데다 켜고 끄는 버튼밖에 없는 ‘탱크 삐삐’가 전부였다. 전화번호 호출만 가능했다.

용건을 녹음할 수 있는 음성사서함 서비스는 94년 시작됐다. 삐삐는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작아졌고, 손목시계·목걸이·카드형 등으로 디자인이 다양해졌다. 빨강·노랑·투명의 ‘컬러 삐삐’가 등장했다. 여성잡지에는 ‘삐삐로 분위기 연출하는 법’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삐삐는 졸업·입학 선물 1위였다.



젊은세대에서는 삐삐 ‘숫자암호’가 유행했다. ‘8282(빨리빨리)’와 ‘7942(친구사이)’는 기본. 삼삼칠 박수에서 힌트를 얻은 ‘337337(격려)’, 숫자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1010235(열렬히 사모)’, 거꾸로 보면 독일어로 ‘사랑’을 뜻하는 ‘38317’, 술 한잔 하자는 의미의 ‘1212(홀짝홀짝)’ 등이 널리 쓰였다. 시험 때 먼저 퇴실한 학생들이 객관식 문제 답을 삐삐로 알려주는 신종 커닝 수법을 사용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93년부터 5년 동안 삐삐를 사용한 송윤서씨(30·회사원)는 “삐삐 음성사서함은 편지 역할을 대신했다”라며 “직접 말로 하기 힘든 이야기를 사서함에 전하곤 했다”고 회상했다. 늦은 밤,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공중전화를 붙들고 삐삐에 ‘사랑고백’을 남겨놓는 일도 흔했다. 1월1일 새벽에는 새해 인사말을 남기려는 이들이 폭주해 삐삐가 불통되곤 했다.

삐삐는 ‘족쇄’ 역할을 했다. 직장인에게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회사의 호출이 골칫거리였다. 남편의 회식자리가 길어지면 아내는 삐삐로 호출해 바가지를 긁었다. “지하에 있어 호출 못 받았다”가 단골 변명이었다. 삐삐는 업무용보다 일과 뒤 약속시간을 정하는 데 더 많이 쓰였다. 96년 무선호출서비스사업자 나래이동통신이 가입자 1백55만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하루 평균 호출 횟수는 4.6회, 호출이 몰리는 시간은 오후 5~6시였다. 공공장소에서 삐삐 소음을 문제삼는 기사도 가끔 신문에 실렸다.

98년말 휴대폰 가입자 수가 삐삐 가입자 수를 앞지른다. 삐삐는 빠른 속도로 휴대폰으로 교체됐다. 현재 삐삐사업은 리얼텔레콤에서만 취급하고 있다. 가입자 10만명 중 의사나 군인 등이 30%를 차지하고 있어 강씨 같은 자발적 삐삐사용자는 7만명 정도다.



리얼텔레콤 한준식 경영지원팀장은 “요금이 저렴하고 호출에 선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삐삐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수신율과 서비스여건은 예전만 못하다. 지하철에선 거의 수신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동전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공중전화를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호출기 제조업체들은 국내 수요가 거의 끊어졌지만 미국·캐나다·중국 등 해외시장을 개척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무선호출기 제조업체 사이버트리는 지난해 캐나다 시장의 70%를 점유하기도 했다. 전화 모뎀으로 PC통신에 접속해 밤을 새우던 때, 삐삐는 이따금 호출음을 울려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삐삐의 시대’는 짧았다. 삐삐를 소재로 단편소설을 발표한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포스트 잇’에서 이렇게 썼다.

‘…내 소설 ‘호출’ 속의 삐삐도 비슷한 운명이다. 지하철에서 처음 만난 여자에게 삐삐를 주고 내리는 장면은 훗날 교과서에 실리기라도 한다면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삐삐:전화를 걸어 전화번호를 비롯한 간단한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일방향 통신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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