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통신] "꼭 실명을 말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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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쓴이 : 전국교차로협의회
  • 03.07.30 11:15:56
  • 조회: 575
“실명이 뭐냐”는 질문에 ‘소드’(19·대학생)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인터넷 아이디(ID)가 실명을 대신한 지 5년째. ‘최충민’이란 본명이 어색하기만 하다. 회사에서까지 ‘베키’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는 이경하씨(27·여)도 실명보다 예명이 익숙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e메일로 의사소통하고, 거래처 사람들과 메신저로 대화하는 데 익숙해지다보니 어느새 예명이 그녀의 또다른 이름이 됐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문화에서 ‘아이디’는 필수적이다. 탄생과 함께 이름을 갖는 것처럼 온라인 세계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이디를 가지게 된다. 최근 이 온라인 아이디를 이름 대신 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인터넷 아이디의 실명화. 그 세계로 들어가봤다.

캐릭터 동호회 ‘캐찹(club.jungle.co.kr/chachap)’의 정기모임 현장. “캐찹짱 형! 잘 지냈어요?” “어이! 쪼꼬우유, 노랑과자. 여기야, 여기!” 캐찹·가지소녀·부루퉁라면·라면땅·식충고릴라·로스구이…. 사람 이름 대신 음식 이름을 불러대면서 대화를 이어간다.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데도 아랑곳없다. 이 괴상한 이름들은 회원의 아이디. 지난 2001년 동호회 결성 후 매월 첫째주 토요일마다 모이고 있는데, 누구도 실명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직까지 서로의 실명을 알지 못한다.

‘캐찹’처럼 온라인 동호회의 오프라인 정기모임에서 아이디를 부르며 대화하는 것은 보편적인 일이 됐다. 몇년 전만 해도 온라인에서 닉네임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만나는 자리인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자연스럽게 ‘통성명’하며 나이·직업·취미 등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나 최근 그런 절차는 사라졌다. 온라인에서 사용하는 아이디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대로 상대방을 인식한다. 최근에는 이 온라인 아이디가 실명을 대신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배삼’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고 있는 배국진씨(23·대학생)는 친구·가족들조차 예명을 부를 정도이고, 일러스트레이터 최원근씨(28)도 작가 ‘델로스’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온라인 상에서만 쓰이는 아이디가 일상생활에서 이름을 대신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경하씨는 “‘접속’을 통해 나를 나타내는 것에 익숙해지다보니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최원근씨는 “인터넷 아이디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수동적으로 받는 형식이 아니므로 그 속에 개성이 담겨 있다”며 “아무래도 내 성격에 맞게 지은 이름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민정씨(27·대학원생)는 자기가 바라는 이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닉네임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한다. 이제 막 행위예술 작가 활동을 시작한 김씨. 5년 전부터 ‘아조’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 이소룡의 기합소리를 따서 ‘아조’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그녀는 명함에 아예 ‘아조’라는 아이디를 이름 대신 새겨서 가지고 다닌다. 그녀는 ‘아조’ 말고도 ‘주디’라는 또하나의 아이디를 갖고 있다. 작가 ‘아조’로 생활하다 지칠 때는 ‘주디’라는 아이디로 동호회에 접속, 귀여운 여인으로 변신한다.

하루에도 수천번 불리는 이름. 이름이 사람의 인생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속설에 따라 부모들은 아이들 이름짓기에 신중을 기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 예명을 짓는 것도 단순한 일은 아니다.

‘이소카임’ 이라는 아이디를 쓰고 있는 한 네티즌은 “2년 전 별 생각 없이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아이디가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가 됐다는 생각이 든다”며 “늘 내 닉네임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줄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새로 아이디를 짓는 중·고생들은 더욱 고심을 한다. 닉네임을 예쁘게 멋지게 꾸미고자 하는 초·중·고생들은 온라인 동호회 ‘예쁜 메일을 날리자(cafe.daum.net/ prettymail1004)’ ‘버디정보(cafe.daum.net/jsnara8282)’ 등에 모여 예쁜 닉네임, 튀는 아이디, 눈에 띄는 e메일 주소 등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컨닝고수’ ‘뱃살공쥬’ 등 재미있게 불릴 수 있는 아이디뿐 아니라 각종 특이문자에 태그 등을 합성한 외계어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온라인 아이디가 실명을 대체하는 시대. 보통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만, 반드시 좋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경하씨는 “온라인 동호회 현장에서 실명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보면 익숙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예명을 쓰는 사람들에게만 쉽게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고, 자신의 실명이 오가면 왠지 발가벗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최모씨(27·여)도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늘 예명을 사용하다보니 익명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서만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톡톡 튀는 개성적인 이름으로 자신을 새롭게 포장하는 신세대 젊은이들. ‘예명’이라는 또다른 문화를 만들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정체성의 혼란’도 느끼고 있다. 인터넷 아이디를 꾸미는 동호회뿐 아니라 정체성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나누는 동호회가 생겨날지도 모를 일이다.

경향신문 기사·사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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